<아포크리파 제로>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쌍둥이 왕자들이 나락왕의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다. 승자에겐 왕관이 주어지지만 패자는 목숨을 빼앗긴다. 플라티나와 알렉, 게임은 두 왕자의 시점을 각각 다루는 시디 두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물론 이 심각한 주제는 주인공들의 연애 행각을 풀어놓기 위한 최소한의 큰 틀 이상의 의미는 없다. 전형적인 연애 시뮬레이션인 이 게임의 특징이라면, 왕자들이 사귀는 게 전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데 있다. 이 게임은 이른바 야오이다. 야오이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성애와는 다르다. 주인공이 아름답지 않으면 야오이가 아니다. 당장 여자 옷을 입고 나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남자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쪽 장르에 넣을 수 없다. 퀴어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난호에 설명했던) 미소녀물과 같은 맥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야오이의 소비자는 99.9% 여자다. 이렇게까지 남자들에 대해 배타적인 장르는 또 없을 것이다. 만화나 소설과는 달리 남성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시장인 게임 업계에서 야오이는 마이너 중에 마이너일 수밖에 없다. 남자 주제에 이 게임을 하게 된 건 우연히 구경한 데모의 화려한 비주얼 때문이었다. 탐미적인 장르의 특성상 캐릭터에 무척 공을 들였는데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런데 정작 게임을 플레이하니 별 재미가 없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두근두근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화려한 캐릭터에 눈이 즐거운 건 사실이지만 그것뿐이다.
역시 남자인 내가 남자 캐릭터에 대한 연애에 감정 이입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할 걸까 하지만 여자들이 남성용 연애 시뮬레이션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많은 여자들이 예쁜 ‘여자’ 캐릭터와의 데이트를 즐거워한다. 뿐만 아니라 <도키메키 걸즈 사이드> 같은 여성용 연애 시뮬레이션을 흥미롭게 플레이한 남성 게이머 역시 존재한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현실에서의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게 게임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현실과 다른 입장과 처지이기 때문에 몰입할 수 없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없다.
게임을 즐기지 못한 건 <아포크리파 제로>의 시스템이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게임이라면 단순히 남자라는, 혹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할 수 없어서는 곤란하다. 마이너 장르이니만큼 아직 충분한 노하우가 쌓이지 않았을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식의 설명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 게임이 많은 여성 게이머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캐릭터성이 중요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야오이 게임이 워낙 몇 안 되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꽤 많은 팬사이트가 개설될 정도의 반응을 얻고 있는 건 사실인 것이다.
왜 야오이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당하는 게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설명이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다른 장르에 대한 비교 우위를 발견할 수는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오이 게임의 재미를 느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발견할 수 없는 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약이 오른다. 그리고 궁금하다. 알고 싶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양도 많아질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