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서 직장을 쉬고 있는 후배가 전화해 컴퓨터가 다운됐다면서 울었다. 바이러스를 먹었는지 하드에 있는 파일들이 다 날아갔다고 했다. 몰래 써놓은 비장의 원고가 날아간 것도 아닌데, 후배는 더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울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하나뿐인 딸을 미국의 남편한테 보낸 린야밤에 술 마시다가 전화해서는 대성통곡을 했다. “외로워 죽겠어.”
언젠가 이들에게 느닷없이 전화해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로 징징 짰던 경력은 까맣게 잊은 채, 나는 정신과의사 또는 학교선생님의 의기양양한 태도로 처방과 훈계를 전달했다. 음, 말이지. 컴퓨터가 다운된 건 하나의 계기일 뿐이고 너는 지금 너무 외로운 거야. 이제 그만 쉬고 직장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너는, 아무래도 딸을 도로 데려와야겠구나. 안 된다고 아님 말고. 음, 외로운 것도 좀 지나면 적응이 될 거야.
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 지난 2년 반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돈이 궁한 것도, 소설 쓰는 것도, 아이들 뒤치다꺼리도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동료들하고 떼거지로 몰려가서 점심먹고 떠들어대고 회의하고 농담하던 나의 사회적 자아가 매일 내 안에서 투정을 부렸다. 소설 쓰는 작업 자체는 신기하기도 하고 근사하기도 했는데 심심한 것만은 참기 힘들었다. 주인공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 딜레마에 빠질 때 오직 혼자 결정할 뿐 누구더러 회의 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 절대적인 고독! 고독은 그야말로 내 연구주제였다. 논문만 안 썼을 뿐이다.
현대인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고독이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만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는 아니다. 바깥세계와 관계 맺으려는 욕구도 생리현상만큼 강제적인 것이다. 굶주림이 육체의 죽음을 초래하듯, 고독은 정신의 죽음을 초래한다. 바깥세계와의 관계도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고독 역시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정신분열에 이고독을 맛볼 수 있고, 수행 중인 승려나 투옥돼 있는 정치범처럼, 육신은 고립돼 있다 해도 정신적으로는 고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정작 육체적인 고독은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이건 내 연구 결과가 아니고 에리히 프롬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즘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물러나 성대 앞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혼자 지내는 서준식 선생에게 “소설 쓰는 건 다 좋은데 심심해서 죽겠어요. 선생님은 심심하지 않으세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안 심심해요. 혼자 있는 게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 이런! 대답을 듣고서야 질문이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弩습깨달았다. 그는 17년을 감옥에서, 그것도 거의 독방에서 보낸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출판된 <서준식옥중서한>을 보면서 나는 좀 울었다. 일본서 건너와서는 면회를 금지당한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물바람으로 호송차를 뒤쫓아올 때, 차입할 책이름을 불러주자 어머니가 야학에서 배운 솜씨로 어찌어찌 받아 적어보려 애쓰다가 면회시끝나고 말았을 때, 일체의 인쇄매체를 차단당한 지 6개월 만에 약병에 따라온 사용설명서를 보고 감격했을 때, 그건 내게도 잊혀지지 않을 삽화로 남겨졌다. 하지만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청동처럼 강건한 정신과 창날처럼 꼿꼿했던 투지가, 집요한 고독의 이빨 앞에서 조금씩 상처를 입어갈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서준식 선생이 윌리엄 블레이크를 인용해서 어느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그 자신도 고독이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다. 서준식 선생이 자청한 고독은 그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기도 했고, 당연히 그 보상은 사회가 나눠가졌다. 그는 사회안전법이라는 괴물 손아귀에서 혼자 구출되느니 그 괴물과 인생을 걸고 겨루고자 했고, 마침내 괴물을 죽이고 사지에서 빠져나왔다.
사회의 죄를 대속하는 17년의 절대 고독. 뭐, 그 앞에서는 우리가 “외로워 죽겠어”하는 말들은 그저 칭얼거림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대개의 우리는 자기 한몸 안에 들어 있는 고독을 주체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인생인 걸. 어떤 책임을 맡는 건 스트레스이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건 외로움이다. 어차피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스트레스 단지에 머리를 거꾸로 담그는 쪽보다는 외로움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는 쪽이 낫겠다. 그래서 나도 그 오연한 고독의 자세를 배워보려 한다. 육신의 고독쯤은 발톱의 때처럼 조소할 수 있는 그런.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