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미소녀 게임’이란, 동그란 눈동자와 날씬한 허리의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쏟아져나오는 게임을 말한다. 장르에 관계없이 무조건 예쁜 캐릭터들이 나오면 그렇게 부르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소녀 게임은 역시 시스템보다는 캐릭터로 말한다. 귀여운 캐릭터만 보고 덤벼드는 게임 문외한이라도 쉽게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파워 돌> 시리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메크 부대의 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휘하 파일럿이 전부 제복을 입은 미소녀들이다. 누가 누군지 구별도 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미소녀 인해전술에 마음이 풍요로워지지만 몇턴 되지 않아 정신이 바짝 난다. 메크 커스터마이즈부터 우선 까다롭고, 파일럿과 메크 사이의 상성을 고려하다 보면 아직 출진도 안 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전투에 돌입하면 더 어려운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이쯤 되면 캐릭터들이 귀엽기는커녕 징글징글하기만 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게임으로 제일 유명한 것은 역시 <랑그릿사> 시리즈다. 이번에는 미소녀뿐 아니라 여자보다 더 예쁜 미소년, 미청년들도 나온다. 캐릭터디자인을 맡은 우루시하라 사토시는 여성 캐릭터의 노출이 심하기로 이름이 높다. 여기에 혹해 달려든 사람들 중 상당수가 눈물을 흘리며 장렬히 전사한다. 전투마다 아군과 적군의 능력, 지형 등을 충분히 파악하고나서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할 뿐 아니라 아군의 균형잡힌 성장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까딱 뒤처졌다가는 다시는 만회할 기회가 없다. 더 무서운 건, 아무리 잘 키운 캐릭터라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충분히 전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느 게임과는 달리 어느 정도 키워놓아도 편안하게 진행할 수만은 없다.
이번에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2 게임 <라 퓌셀>도 이 일가에 속한다. 동그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동자, 다리가 좀 굵은 것만 빼고는 깜찍하기 그지없는 캐릭터들이다. 동네 사람들이나 상점 점원, 심지어 맞서 싸워야 하는 몬스터까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귀여울까에 온 정성을 쏟았다. 이 게임의 첫인상은 라이트 유저를 겨냥한 편안한 게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근래에 이렇게 복잡하고 방대한 게임 시스템을 본 적이 없다. 전투 자체도 까다롭지만 더 어려운 건 캐릭터 성장이다. 어떤 아이템을 장착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성장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성장에 좋은 아이템과 성능이 좋은 아이템이 달라서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정화 시스템을 통해 아이템 자체도 성장하는데, 무작정 할 게 아니라 세팅을 잘해서 한번이라도 ‘대기적’을 일으키는 게 몇십, 몇백번의 평범한 정화보다 훨씬 낫다. 아이템 합성 한번 하려면 따져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정화해서 아군으로 끌어온 몬스터를 제대로 키우려면 호감도와 능력치가 오르내리는 데 유의하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써야 한다. 지금까지 스무 시간 정도 했는데, 아무래도 오백 시간은 해야 끝날 것 같다. 화려한 캐릭터로 빈약한 게임성을 감추려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그래픽에는 신경쓰지 않는 회사’라는 소리를 감수하며 시스템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게임이 있다. 기술 진보의 최전방에서 3D그래픽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게임이 있는 한편,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2D ‘도트 노가다’에 매진하는 게임이 있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그래픽 뒤에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을 숨겨놓은 게임이 있다. 어떤 게 제일 좋은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어떤 게 가장 한심한지는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