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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생각
2002-10-09

신경숙의 이창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여학생은 담배를 내놓고 피우진 못했다. 칸막이가 쳐진 학사주점이나 화장실, 남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 피웠다. 마음놓고 피울 수 없으니 오히려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한번은 담배를 피워봤는데 어찌나 생머리가 아프던지 이후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려서부터 치아가 좋질 않아서 아버지가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읍내의 치과에 다녔다. 아린 이 있는 뺨쪽을 아버지 등에 대고 있으면 맡아지는 냄새. 그것이 아버지 냄새라고 여겼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할 때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서면 더 짙게 맡아지던 냄새.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잠바를 빨려고 주머니에 든 것들을 빼내는데 담뱃갑과 접혀진 지폐가 나왔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아버지 냄새라고 여긴 냄새의 출처가 싸구려 담배와 꼬깃하게 접힌 지폐에서 풍겨나왔다는 것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남자친구가 연기를 고리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아올리는 모습이나 손을 잡고 났을 때 손끝에서 맡아지는 담배냄새가 싫지 않았다. 목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가 한번은 다방에서 담배를 피웠더니 뒷자리에 있던 모르는 남자가 와서 자기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꼴은 못 본다고 눈을 부라리는 통에 놀라 담뱃불을 껐다고 했을 때는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너와 나는 언제나 담배 피우는 모르는 남자에게 눈을 부라릴 수 있을까? 하며. 고시공부를 하다가 디스크로 수술을 받은 오빠가 수술실에서 처음 나와 눈도 뜨지 않은 채 내뱉었던 말은 담배 한대… 였다. 그때 담배를 오빠의 입에 물려주었던가 말았던가.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처음 손에 쥐고 시골집에 가게 되었을 때 역 앞에서 아버지에게 드릴 담배 한 보루를 샀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년도 지난 얘기가 되어버렸다.

어느 여름방학에 책을 쌀 수 있을 만큼 싸가지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무료했다. 폭염은 연일 계속되고 담장 위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고 식구들은 다들 어디 갔는지 집엔 나 혼자였다. 바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잠바를 벗어 마루에 던져놓고 다시 나가셨다. 잠바 안주머니에서 담배개비가 빠져나와 있었다. 그것 한 개비와 성냥을 들고 뒤꼍으로 간 건 순전히 심심해서였다. 그 집의 구조상 뒤꼍은 어느 쪽으로나 돌아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걸 깜박 잊고는 한쪽만 신경쓴 채 머위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켜서 불을 붙였을 때 내가 신경쓰고 있는 반대쪽에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담배를 문 채로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만큼이나 놀라셨을 아버지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돌아서 앞마당쪽으로 나갔다. 불이 붙어 있는 담배를 머위밭에 내던졌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끝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왜 침묵하셨는지는 미욱한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감당이 안되어 못 본 것으로 하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계셨던 것인지. 다만 그날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면 나는 아마 두통을 극복하며 담배를 배웠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에 여럿이서 영종도에 놀러갔는데 한 친구가 바다가 내다보이는 언덕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런 풍경 앞에서 한대 안 피울 수 없지, 했을 때 너무 맛있어 보였으니까. 아버지는 쉰이 되기도 전에 담배가 치명적인 병을 앓기 시작했으므로 더이상 담배를 사드릴 수가 없었다.

어제는 친구 생일이어서 모처럼 몇몇이 만났다. 그중 한 친구가 레몬담배를 꺼냈다. 어느 날 통화중에 친구에게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잔소리를 했더니 그러잖아도 쑥담배로 바꿨다고 했다. 쑥담배? 쑥으로 담배를? 의아했는데 이번엔 레몬담배였다. 처음 샀는데 한갑에 3천원이나 하더라며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끊으면 되잖아, 하려다가 담배를 입에 문 딸을 보고도 한마디 안 하던 아버지가 생각나 눌러 참았다. 담배는 숭고하다,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담배는 숭고할지 몰라도 담배 피우는 일은 점점 왜소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