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김유진 감독이 4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왔다. 10월 중순 강원도 바닷가에서 촬영을 시작할 김유진 감독의 신작은 강력계 형사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와일드 카드>(가제). 30대와 20대의 두 형사가, 지나가는 사람을 때려 기절시킨 뒤 금품을 빼앗는 ‘퍽치기’ 일당을 뒤쫓는 이야기다. “깡패영화가 인기를 얻어 고등학생들까지 깡패를 꿈꾸는 요즘, 정반대로 나가고 싶어서” 형사를 소재로 택했다는 김유진 감독은 <약속>의 파트너 이만희 작가와 함께 1년 넘게 꼼꼼한 취재와 인터뷰를 거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은퇴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찍은 <약속>이 흥행에 크게 성공한 98년 이후, 각각 1년을 투자한 두개의 프로젝트가 모두 무산돼 긴 휴식을 가졌지만, 김유진 감독은 “항상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밤샘촬영에 대비해 쑥으로 만든 일종의 대용담배를 피우면서 한약까지 먹고 있는 김유진 감독. 그는 자신의 영화사 유진 E&C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달력 날짜를 헤아리면서, 정진영과 양동근이라는 든든한 두 주연배우, <텔미썸딩>의 장윤현 감독이 운영하는 공동제작사 씨앤필름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스타트를 준비하고 있다.
<약속> 이후 신작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쉬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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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들 내가 놀기만 한 줄 아는데…. (웃음) 계속 바쁘게 일했다. 처음엔 사기꾼이 주인공인 영화를 준비하다가 시나리오가 완성된 상태에서도 그리 재미가 없어 포기했다. 그 다음엔 불임부부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하루>가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하루> 제작사는 우리쪽이 더 많이 진척된 상태라면서 양보하려고 했지만, 왠지 자신이 없어 그만뒀다. 아마 이만희 작가가 그 일 때문에 좀 서운했을 거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보낸 시간이 2년이다. <와일드 카드>는 지난해 봄에 시작했다.
투자사인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 시나리오가 너무 좋아서 쉽게 투자를 결정했다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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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안 해주면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욕할 거 아니까 투자한 거지. (웃음) 강우석 감독은 워낙 좋은 형사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예전부터 잘 어울리던 사이라서 빠르게 결정을 내린 것 같다. <와일드 카드>가 <공공의 적>하고 비슷하다는 사람도 많지만, 강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나서 전혀 다른 영화라고 하더라.
씨앤필름의 장윤현 감독과는 어떻게 공동제작을 하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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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현 감독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라서 내가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는 부분에 활력을 준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 됐는데, 어느 날 보니까 씨앤필름을 차려서 혼자 독립한 거다. 그때부터 혼자 해서 뭐하냐, 우리 같이 하자,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영화를 하다보니 소재를 찾는 일부터 기획, 시나리오 작업, 제작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기획단계에 조언자가 있으면 참 좋겠더라. 장 감독은 워낙 논리적이고 말도 잘하고 사기도 잘 쳐서…. (웃음)
<와일드 카드>는 강력계 형사들이 중심이면서도 사실적이고 세심한 일상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형사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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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를 좀더 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강력계 형사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많이 그려졌지만, 난 그들도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떻게 밥먹고 잠자고 일하고 마누라와 연애하는지, 밖에서 알지 못하는 일상을 따뜻하게 그리려고 했다. 이만희 작가와 함께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자료도 수집했다. <와일드 카드>에 나오는 가라오케 살인사건은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 건데,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형사들은 그런 미결사건에 관해 얘기하기를 싫어한다. 자신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피해자가 편안하게 눈감도록 해주지 못했다는 책임감이 있는 거다. 그 사람들은 시체 앞에서 경건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범인을 잡아야만 한다는 염원 같은 것이 있어서, 무심코 살인사건을 지나치는 우리보다 아픔이 많다. <와일드 카드>에선 그런 부분이 정말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
‘퍽치기’라는 소재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형사영화에선 그리 주목하지 않는 소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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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퍽치기가 무섭고 흉포한 범죄라고 생각해왔다. 퍽치기는 누가 언제 어디서 당하게 될지 모른다. 옛날 강도는 손 들라는 예고라도 했는데. 범죄도 더러워지고 있는 거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서 돈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망치나 야구 방망이로 무작정 때리는 건데, 반은 죽고 반은 반신불수, 운좋은 몇명만 잠깐 병원에 입원하는 정도다. 얼마 전 택시 트렁크에 여자 시체를 싣고 다니면서 범죄를 저지르던 사람이 있었지 않나. 그것도 일종의 퍽치기고, 경찰에선 실제로 퍽치기라고 불렀다. 형사들은 그런 사건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집에서 일어난 살인은 대충 보기만 해도 누가 범인인지 감이 잡히는데, 길가다 살해되면 증거도 연고도 없다. 그럴 땐 온갖 짓을 다한다. 주변 몇 km 이내를 다 탐문수사하고, 범죄가 일어났을 거라고 추정되는 시간에 범인의 동선을 따라 돌면서 전단지 뿌리고, 무작정 잠복근무하고. 형사들의 일상을 담는 <와일드 카드>에도 잘 어울리는 소재였다.
에피소드나 인물을 만들 때 실제 사건을 모델로 삼은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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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치기 노재봉 일당이 저지른 살인은 전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가라오케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순화했다. 원래 여자 네명을 살해했는데 두명으로 줄였으니까. “출근할 때 한놈 잡고, 퇴근할 때 두놈 잡는다”는 김 반장은 전설적인 소매치기 담당형사한테서 따왔다. 깡패들 사이에 랭킹이 있는 것처럼, 형사들 사이에도 종로서 누가 세다더라하는 리스트가 있다. 그 소매치기 담당형사는 지하철 수사대 소속인데 지하철 타고 출퇴근할 때마다 소매치기가 자꾸 눈에 띄어서 진짜 “출근할 때 한놈, 퇴근할 때 두놈”이 된 거다.
<와일드 카드>는 형사들의 진솔하고 따뜻한 심성을 그리는 드라마가 한축이고 퍽치기 일당의 범죄가 다른 한축이다. 잔잔하게 흐르던 드라마가 살인사건을 만날 때마다 서늘하게 변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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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면 훨씬 더 심할 거다. 이만희 작가는 영화의 리듬을 아는 사람이다. 관객이 아, 이제 화장실 가고 싶다, 이러면서 지루해 하다가도 그런 장면이 한번씩 나오면 멈칫하게 된다. 그만큼 살인이 자극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가라오케 장면에서 죽는 여자 옷도 벗기려고 했는데, 다들 너무 흉측하다, 시체 역하면서 옷까지 벗을 여배우는 구하기도 힘들다, 이러면서 말리더라. (웃음) 자극적인 장면을 자극적이지 않게 묘사하면서도, 강렬한 자극을 주는 것. 그게 고민이다.
정진영과 양동근은 꽤 잘 어울리는 콤비로 보인다. 정진영은 <약속> 때도 함께 작업한 배우인데, 원래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양동근은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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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이야 몸값도 싸고… 농담이다. 그동안 많이 비싼 배우가 됐다. (웃음) 정진영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지금도 머리 싸매고 부안 내소산가에 들어가 시나리오 연구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공부 좀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웃음) 양동근은 어렸을 때 연기하던 거, 얼마 전에 출연한 <네멋대로 해라>, 노래하고 춤추는 거, 다 봤다. 생긴 건 촌놈인데 대단하다. 어울리지 않는 멜로드라마에 출연해 멜로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놨으니까. 그런 활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걱정도 된다. 정진영이랑 양동근은 둘 다 현장에서 감독을 엄청나게 귀찮게 할 배우라서. 현장에서 내 생각, 내 고민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와서 질문하고 확인받고, 그럴 것 같다. (웃음)
<약속>은 김유진 감독 작품 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연출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고, 그만큼 <와일드 카드>의 부담도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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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워낙 잘 만드는 감독이라 전에 흥행에 다 실패했어도 일하자는 사람은 무지 많았다. (웃음) 작업하면서 흥행에 관한 부분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거기에 신경쓰면서 일하자니까 제대로 일이 안 되더라.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보자. 그건 감독만 잘해서 된 일이 아니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 제대로 일해준 스탭들, 밤새우면서 포스터 문안 쓰는 사람들이 다 제몫을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건데, 아무래도 공은 감독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섹스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진짜 화끈하게 만드는 거. 거기까지가 감독이 할 일인데 말이다. 제작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흥행엔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뭐, 요즘 영화치고 순제작비 30억원이면 아담한 수준이기도 하고. (웃음)
그동안 그렇게 자주 영화를 만드는 편은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프로젝트가 무산될 때나 기획부터 완성까지 몇년씩 걸리는 프로젝트를 끌고 나갈 때의 긴장을 견디기가 힘들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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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하다보니까 이젠 그걸 즐기게 된 것 같다. 몇년 만에 어렵게 만든 영화가 완성됐을 때의 쾌감도 좋고. 어떻게 생각하면 영화 만드는 게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닐지 모른다. 이거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영화를 하고 있는 건도 모르는데, 프로젝트에 몰두하다 보면 그 생각만 하게 된다. 입봉작이 곧바로 은퇴작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도 지금까지 영화를 계속하고 있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감독만 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약간 미안하기도 하다. 요즘은 쌍칼을 든 검객에 관한 영화가 욕심난다. 중국영화처럼 날아다니진 못하니까 웬만하면 땅에 붙어서 하는 걸로. (웃음)
<약속> 이후 4년 동안 한국영화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오래간만에 현장에 나서게 됐는데 지금 어떤 심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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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긴 정말 많이 변했더라. 난 제작비가 세배가 됐다고 해서 감독료도 세배가 된 줄 알았는데, 감독료는 그대로다. (웃음) 기술이나 제작방식이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감독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걱정되는 건 아직 배우 캐스팅이나 헌팅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아서 머리 속이 스산하다는 거. 잠복근무를 다루는 영화라 밤샘촬영이 많을 것도 좀 걱정된다. 시나리오나 소재의 전형성을 어떻게 영상으로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도. 그래서 다음주쯤 <와일드 카드> 팀 전부를 데리고 MT와 고사를 겸한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놀러가려면 밥값은 해야 하니까 촬영도 세 시간 정도 잠깐 해봐야겠다.
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