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하는 엄마와 아빠 때문에 이른 시간에 억지로 잠에서 깨야 하는 세살짜리 아들녀석을 보고 있으면, ‘측은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말 독특한 감정이 생겨난다. 그러다 며칠 전 자는 아이를 억지로 깨우다가 녀석이 갑작스럽게 코피를 쏟아내는 바람에 잠시 정신적 공황상태에 휩싸였을 정도다. 나를 닮아서 코와 목이 약해 감기나 염증이 자주 생겨나긴 했지만, 그렇게 코피를 쏟아내는 모습에 ‘아버지’인 나는 두렵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그저 생물학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런 순간마다 더욱 확실해진다. 이제 겨우 세살배기 아들녀석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자식은 부모가 져야 할 십자가’라고 하는 말이 가슴속에 사무치는 것이다.
샘 멘데스의 <로드 투 퍼디션>은 그런 면에서 ‘한 아버지의 아들이자, 한 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나 같은 이들에게 엄청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물론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아버지 혹은 아들들이 1930년대 미국에서 마피아로 살아가는 아버지인 마이클 설리반 같은 경험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 절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몇 안 되는 수수께끼 중 하나라는 부자관계의 복잡성을 그렇게 보편적인 정서로 잘 풀어낸 영화가 최근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완벽히 샘 멘데스표일 것 같은 이 무게감 있는 영화가 실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헌팅>을 각색하고 의 각본을 썼던 신예 데이비드 셀프의 각색이 훌륭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지만, 원작만화 자체가 뛰어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평도 여기저기서 나왔을 정도다.
영화 <로드 투 퍼디션>의 원작은 DC코믹스에서 1998년 출간된 같은 제목의 304페이지짜리 흑백만화였다. 출판사가 ‘만화’가 아닌 ‘그래픽 소설’이라고 광고를 했던 이 만화는, 그러나 출간되고나서 별다른 시장의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고객을 대상으로 스타 캐릭터들을 자랑하는 만화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미국의 만화시장에서, 우울한 대공황 시대를 그린 흑백만화가 주목을 끈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화의 작가인 맥스 콜린스가 워런 비티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딕 트레이시>를 쓴 장본인이고 1995년 독립영화 <Mommy>를 시작으로 세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당장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더불어 그림을 담당한 리처드 피어스 레이너가 일반적인 만화가와는 달리 원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연출한 뒤, 그 사진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화면을 그려냈다는 사실은 제작자들에게 이 만화가 영화화되었을 때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게 만들어준 면도 있었다.
그렇게 할리우드에 팔려간 이 만화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각색을 담당한 데이비드 셀프였다. <헌팅>을 각색하고 의 시나리오를 쓴 것이 할리우드 경력의 전부여서 어떻게 보면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못할 수도 있는 그는, 원작만화의 이야기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많은 부분을 영화에 걸맞게 훌륭히 바꾸었던 것이다. 만화에 대비해 눈에 띄게 바뀐 부분으로, 우선 영화 속 톰 행크스가 연기한 마이클이라는 인물의 설정을 들 수 있다. 마피아의 충직한 부하라는 이미지 이외에는 별달리 부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영화와는 달리, 만화 속에서 마이클은 ‘킬링머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살인자로서 잔인한 인간으로 그려진다.이와 함께 원작을 쓴 맥스 콜린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만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죄악과 구원의 본성에 대해 많이 묘사하고 있었던 점도 각색되는 과정에서 거의 사라졌다. 예를 들어 마이클이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에는, 성당을 찾아가 살인한 숫자만큼 촛불을 켜고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 등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보다 영화는 마이클이 아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걷지 못하게 보호하려는 모습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개신교적인 분위기를 많이 풍겼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 그런 과정에서 만화보다는 훨씬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라는 부분이 부각되었고, 결국 샘 멘데스 같은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데 출중한 능력을 지닌 감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원작만화 <로드 투 퍼디션>조차도 원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일본에서 출간된 만화인 <외로운 늑대와 그 아들>이라는 제목의 사무라이 만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체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 사무라이 만화는 복수를 위해 아들과 함께 일본 열도를 누비는 한 사무라이의 비장함을 그려낸 작품. 우연히 그 만화를 보게 된 맥스 콜린스가 주인공 사무라이의 비장미에 매혹되어, ‘그래픽 소설’로 <로드 투 퍼디션>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출간되었던 <로드 투 퍼디션>이 영화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자,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그래픽 소설’이라고 출간된 만화들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하는 중이다. 최근 몇년간 <고스트 월드> <프로 헬> 등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둔 몇몇 영화들도 ‘그래픽 소설’들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일부에서는 당분간 영화화된 ‘그래픽 소설’들을 만날 기회가 점점 많아질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로드 투 퍼디션> 공식 홈페이지 : http://www.roadtoperdition.com
Max Allan Collins 비공식 홈페이지 : http://muscanet.com/~phoen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