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수년 동안 타지 않던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았을 때 머리 속에서 자전거 타기에 관한 매뉴얼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두발은 익숙하게 자전거 바퀴를 굴린다. 아마도 근육이 자전거를 기억하고 있나보다. 술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집을 찾아가는 건 뭘까. 공식적으로 그건 무의식의 작용이고 무의식의 소속은 머리로 분류되겠지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아는 건 아무래도 가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악기를 다루는 사람에게 멜로디를 기억하는 건 뭘까. 그건 손가락이다.
아코디언을 치기 시작한 것도 이제 2년이 넘었는데, 음악이론 공부 없이 노래책들을 집에 쌓아놓고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쳐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식한 연습도 어느 정도 쌓이니 언제부턴가 간혹 어떤 멜로디가 나오면 거기에 맞는 화성을 손가락이 찾아냈다. 머리가 교본을 읽고 화성을 학습하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그 공식을 알아낸 것이다. 모든 말초신경, 중추신경이 다 뇌로 연결되거나 말거나 여하튼 내가 보기에 기특한 건 손가락이다.
그러다 최근에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을 했다. 모든 노래들이 그 음계의 으뜸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가단조는 으뜸음이 ‘라’인데 ‘미’로 시작하든(<그때 그 사람>) ‘도’로 시작하든(<꿈속의 고향>) ‘라’로 시작하든(<북한강에서>) 모두 ‘라’로 끝나고 있었다. 또 라단조는 으뜸음이 ‘레’인데 ‘파’로 시작하든(<밤안개>) ‘레’로 시작하든(<목포의 눈물>) ‘라’로 시작하든(<태양은 가득히>) 모두 ‘레’로 끝났다. 이런 법칙이 있다니! 놀라운 발견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흥분해서 이 놀라운 발견을 털어놓았더니 한 후배가 놀라기는커녕 놀렸다. “그것도 몰랐어요? 중학교 때 음악시간에 다 배운 건대. 모든 노래는 으뜸음으로 끝난다. 그걸 완전마침이라고 한다. 간혹 으뜸음이 아닌 걸로 끝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불완전마침이다,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법칙이 흥미롭다. 노래라는 건 ‘도’에서 ‘시’에 이르는 일곱 계단 위에서 이루어지는 판타지다. 이 판타지는 더러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다가 느리게 흐르기도 하고 또는 헉헉대며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그 마지막엔 언제나 일정한 지점, 가장 편안한 지점에 안착하는 것이다. 종국에는 그 중심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기를 치켜세우거나 놀리거나 할 때 “갖고 놀다가 도로 제자리에만 갖다놔”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보면 이 공식은 이야기 장르에도 적용되는 거 같다. 희극이 장조의 노래라면 비극은 단조의 노래다. 그래서 희극은 우리가 인생에서 기대하는 가장 행복한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비극은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어떤 지점에서 멈춰버린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을 넘어 완전마침과 불완전마침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불완전마침은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최근에 내놓은 내 소설은 두 주인공이 극단의 이상주의와 극단의 자유주의로부터 출발해서 각기 중간의 길, 어떤 균형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순간들을 지나서 마침내 인생의 어떤 평평한 지대 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끝난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합당한 ‘완전마침’인 셈이다. 그런데 단 하나, 주인공이 위험에 빠질 소지가 남아 있도록 이야기 줄기 하나를 열어둔 상태로 끝내놓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간혹 이걸 문제삼는다. 영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리적으로 ‘불완전마침’을 거부하는 것이다. 선량한 주인공이 위험에 빠지거나 누명을 쓴 상태에서 끝난다면 이건 불완전마침이다. 하지만 이유있는 파멸이라면 그건 완전마침이다. <데미지>나 <태양은 가득히> 같은 비극들은 서글픔만 잔뜩 안겨놓고 끝나는데 하지만 그 서글픔에는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투항의 편안함 같은 게 있다.
이야기의 마무리에서 작가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다. 이야기를 끌고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결국은 자신에게 가장 편한 장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영화를 볼 때마다 그 결말에서 작가의 마음가짐을 읽으려고 해본다.
하지만 공연히 흥분해서 “내가 최근에 발견한 건데 모든 드라마는 결말에 작가의 세계관이 응축돼 있는 거야”라고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거 이제 알았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