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유골>엘리스 피터스 지음/ 북하우스 펴냄
중세의 수도원은 속세와 떨어진 초월의 공간이 아니었다. 음모와 밀담이 모여들고, 추악한 욕망이 그늘처럼 고여 있는 장소. <성녀의 유골>은 먼지투성이 세상을 버리고 승복을 입은 캐드펠 수도사가 끊임없이 살인에 휘말리며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는 '캐드펠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다. 캐드펠 수도사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는, 체격이 건장하고 약초에 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노년의 수도사. 그는 시루즈베리 수도원에 잊혀진 성녀 위니프레드의 유골을 안치해 명성을 얻으려는 부원장과 함께 성녀가 죽은 고장 웨일즈로 떠난다. 그곳 귀더린 마을은 순박하고 위엄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성녀의 유골을 내줄 수 없다고 가장 강력하게 고집하던 지주 리샤트가 살해되면서 의혹과 모함으로 더럽혀진다. 잠자는 듯한, 누군가 등 뒤에서 습격한 것이 틀림없는 자세로 숲속에 죽어 있는 리샤트. 그의 딸을 사랑하는 이방인 청년도, 그만 없어지면 성녀를 소유할 수 있는 부원장 일파도, 충분히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캐드펠 시리즈'는 유달리 잔인하거나 복잡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는 소설은 아니다. 수도사 중 유일하게 웨일즈인들의 심성을 이해하는 캐드펠이 친근한 태도로 마을을 탐문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퍼올리는 추리 방식이 인간의 가엾은 본성을 전하곤 한다. <성녀의 유골> 역시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동정할 수밖에 없는 살인자를 내세우는 소설. 굳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읽지 않더라도 시루즈베리 수도원 투어 프로그램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은 '캐드펠 시리즈'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안녕, 내 사랑아>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해문출판사 펴냄
필립 말로는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사립탐정이다. 냉소적이고 빈정대기 좋아하고 사람을 믿지 않는, 그러나 범죄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남자. <빅 슬립> <열차의 이방인>의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안녕, 내 사랑아>는 로스앤젤레스의 부패한 가스를 온몸으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필립 말로의 또다른 이야기다. 한순간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메마른 문체지만, 그 아래엔 슬픈 치정과 위태로운 욕망이 깔려 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거구의 남자 맬로이의 살인현장을 목격한다. 누군가의 밀고로 감옥에 갔다가 막 출소한 맬로이는 목숨처럼 사랑했던 빨간머리의 여자 벨마를 찾고 있다. 맬로이가 가는 곳마다 터지는 살인사건,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벨마. 호기심 때문에 맬로이를 쫓기 시작한 말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위협과 마주하면서 이 사건에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있을 거라 의심하게 된다. 조각조각 흩어진 에피소드를 주워모아 마침내 8년 전, 모든 일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간 말로. 그는 퍼즐을 완성했지만, 안도해야 할 그 순간, 8년전에 만났던 남녀는 죽음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진실 앞에 던져진다. 그들은 너무 멀리 간 것이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열린책들 펴냄
미술복원가 훌리아는 15세기 플랑드르 화가 반 호이스의 그림 <체스 게임>을 복원하던 중 밑그림에 감춰져 있던 문장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를 발견한다. 훌리아는 이 문장이 숨겨진 역사를 말하려 한다 생각하고, 그림 속의 체스 게임을 역순으로 짚어 누가 기사를 죽였는지, 즉 누가 체스판 위의 기사를 잡았는지 밝혀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지적 유희는 훌리아의 옛 연인 알바로가 살해당하면서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한달음에 읽어내릴 수 있는 추리소설은 아니다. 소품 하나에도 당대에 통용되는 상징을 담고 있는 그림을 해석해야 하며, 도면과 함께 진행되는 체스 게임에 신경을 써야한다. 대충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낯설고 복잡해 보이는 그림 때문에 기가 죽기 쉽다. 그러나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가 남용하는 수식엔 신경쓰지 않으면서 소설에만 집중하면,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풍부한 인용과 게임을 단서로 진행되는 살인의 긴장이 재미있는 작품이다. 페레스 레베르테는 영화 <나인스 게이트>의 원작인 <뒤마클럽>을 쓴 작가. 삽화 속에 숨겨진 단서를 쫓는 <뒤마클럽>처럼,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도 미술과 문학이라는 두가지 예술의 시너지 효과가 만만치 않다.
<다섯번째 여자>헤닝 만켈 지음/ 좋은책만들기 펴냄
내전 중인 알제리의 어느 수녀원, 잔혹하게 살해된 네 명의 수녀 옆에서 또 한 명의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여행객이었던 그 여자는 이방의 종교를 응징하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이 수녀원을 습격한 날, 운나쁘게 그곳에 묵고 있었던 것.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고국 스웨덴에 도착하면서 처벌과 정화의 의미를 담은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다섯번째 여자>는 수사관 쿠르트 발란더가 활약하는 시리즈 중 한 편이다.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3인칭으로 진행되면서도 발란더의 1인칭 시점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문체가 독특한 소설. 발란더는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부패와 무력감으로 무너져내리는 스웨덴의 현실을, 스스로 함께 파괴될 만큼 뼈아프게 체감하는 인물이다. 서로 어떤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다섯번째 여자>의 희생자들은 모두 여자를 학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미소지은 남자>는 부와 권력의 정점에 선 한 남자가 냉정하게 저지른 살인사건이다. 발란더는 또 시신 앞에서 태연한 영화 속 수사관들과 달리 온몸으로 범죄에 반응한다. 순진한 십대 아이들이 시체로 전시되고 동료 수사관이 희생되는 <한여름의 살인>은 잔인한 현실에 지쳐가는 수사관들의 하루하루가 날카롭게 묘사되는 작품. 초조하고 우울한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중에서도 <다섯번째 여자>는 폭력에 찢긴 살인자의 극단적인 심리가 1인칭에 가까운 서술 속에 안쓰럽게 살아나고 있다.
<낯선 들판에서의 유희>알렉산드라 마리니나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추운 나라의 추리소설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나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가 그렇고, 알렉산드라 마리니나의 소설들이 그렇다. 가족은 오래전에 찢어졌거나 망가져가고 있는데, 달리 위안을 찾을 곳도 없고, 범죄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추월해버렸다. 스너프와 포르노 영화라는 낯익은 소재를 다루는 <낯선 들판에서의 유희>는 그 범죄의 근원을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절망에서 찾는, 아나스타샤처럼 약간의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러시아 추리작가 중에서도 한국에 비교적 많이 소개된 마리니나는 법대를 졸업한 전직 경찰. 그녀 자신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주인공 아나스타샤는 혈관과 허리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소로 휴가를 떠난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곳곳에 보이는 그 요양소에서 아나스타샤는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나스타샤의 시점과 교차해 진행되는 것은 고객의 요구에 맞춰 직접 사람을 죽이는 스너프 영화를 찍거나 포르노를 제작하는 어느 범죄조직의 실상. 결국 아나스타샤는 요양소가 중심이 된 조직범죄의 단서를 잡는다. 그녀가 적발해낸 인물들은 흔한 마피아와 달리, 부당하게 내쳐진 상처를 안고 있다.김현정 para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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