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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모델의 파워 돋보이는 롯데리아 크랩버거 광고
2002-09-13

니들이 관록을 알아

제작연도 2002년광고주 롯데리아 제품명 크랩버거 대행사 대홍기획

광고는 해당 제품의 속성을 닮아가는 것 같다. 특히 패스트푸드 CF가 그렇다. 방방곡곡에 한집 건너 자리를 잡은 패스트푸드점은 부담없이 놀러갈 수 있는 친숙한 장소가 된 지 오래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자주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혹시라도 ‘그 나물에 그 밥상’이라며 물려할까봐 끊임없이 새 메뉴와 다채로운 할인서비스로 새로움을 안겨준다. 패스트푸드 광고도 사시사철 브라운관 곳곳을 누비며 소비자의 사정권에서 아른거린다. 또 계속해서 소재 교체를 시도하며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물망초의 꽃말을 속삭인다. 패스트푸드의 기본이 신속과 간편인 것 처럼 패스트푸드 CF도 가볍게 웃고 즐기는, 지극히 ‘킬링 타임’용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늘 재밌기는 하되 눈을 부릅 떠 주목할 거리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맥도날드 광고와 더불어 패스트푸드 광고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롯데리아 CF가 모처럼 홈런포를 날렸다. 요즘 장안에 이 CF 놓고 재미없다는 사람, 정말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할 정도다. 이번 광고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사항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주인공을 담당했다는 점. 젊고 발랄한 모델의 주무대나 다름없는 패스트푸드 CF에 백발수염이 성성한 노인(중견배우 신구)이 습격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한번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듯 이 CF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노인 어부가 쪽배에 홀로 몸을 의지한 채 바다에 떠 있는 장면을 원경으로 포착하며 광고는 시작한다. 바다와 한바탕 사투를 벌이고 난 노어부의 표정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장중한 배경음악이 망망대해 속 조각배의 고독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젊은 어부들을 태운 거함이 질펀하게 배에 등을 기대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들은 노인이 베개 삼은 어마어마한 왕게를 보고 놀란다. 아들뻘 되는 어부들을 향해 노인이 한마디를 던진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이번 광고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유머를 주요 소구방식으로 삼았다. 하기야 빠른 식품 광고에 유머가 빠지면 김치 없는 라면처럼 싱겁고 허전하며 어색할 것이다. 그런데 원전의 무게감을 고려해서인지 한폭의 유화처럼 고급스러운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 CF는 통통 튀는 자극적인 유머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일단 ‘노인과 왕게’라고 제목을 붙일 만한 이 광고는 낯익은 즐거움이라는 패러디의 특성을 잘 활용했다. 시청자는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하며 단박에 낯가림을 없앴다가 원작의 참치 자리를 왕게가 대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서서히 웃음보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을 통해 코믹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쌓은 신구에게 노인 역을 맡긴 것은 적절했다. 젊은이한테 절대 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다할 것 같은 당당함을 지녔으면서도 고리타분하거나 숨막히게 꼬장꼬장할 것 같은 부정적인 냄새가 없는 그의 인상은 젊은 어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절정의 빛을 발한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란 일성은 이 CF의 화룡점정이다. 가진 것이라곤 작은 배 한척밖에 없는 가난하고 늙은 어부지만 관록의 힘을 도도하게 뽐내는 이 말은 묵직하게 귀에 꽂히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또 ‘롯데리아의 크랩버거에는 뭔가 특별한 게맛이 들어 있다’는 제품 메시지로 매끄럽게 전이된다. 이는 진지함을 경박함으로 뒤집는 마지막 반전에서 웃음의 성감대를 찾는 유머 광고의 흔한 전술과도 다르다. 빙그레 웃으며 호쾌하게 ‘니들이…?’를 말하는 노인은 조였던 나사를 한꺼번에 풀면서 망가지는 것과 다른 코미디를 구사하고 있다. 초반의 정적인 기조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입에 착착 감기는 맛있는 대사로 상대를 산뜻하게 제압한다. 여기엔 연기 10단인 신구의 능청맞은 코믹 연기가 큰몫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영화 <집으로…>의 흥행 여진으로 광고계에는 노인 모델을 기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대부분은 가족애나 휴머니티를 강조하는 장치로 노인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게 팬 노인을 비추는 그들의 시선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연민이나 애틋함과 맞닿아 있다. 이번 롯데리아 CF는 실버 모델을 활용한 한 사례에 해당하지만 노인에 대한 그같은 정서적 접근과 현격히 길을 달리해 돋보인다. 사실 누가 노인을 약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권위적인 것과는 다르게 위엄과 당당함을 과시하는 노인의 모습은 젊고 화려한 것만이 잘났고, 또 주류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온 오만함의 허를 찌른다. 노인의 넉넉한 미소를 천상의 것으로 포착한 엔딩신은 조금 과장한다면 숙연함마저 자아낸다. 어르신 말씀에 고분고분 수긍하는 게 무조건 재미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니들이 뭘 아냐’는 광고의 얘기처럼 그동안 뭘 좀 몰랐던 것 같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