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기로 책을 내며 ‘때론 객기가 고전을 사수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주장하는 출판사, 야간비행의 회의 시간. 식구들의 말 끝에 이른바 사장인 내가 말한다. “한국에서 <조선일보>에 책을 안 보내는 출판사가 세곳인데, 강준만 선생 책을 내는 두곳을 빼면 우리밖에 없지.” 조금은 과장일(부디 그렇기를) 내 말에 식구들의 잔잔한 웃음이 번진다. 그 웃음 속에도 객기가 들어 있고 그 객기 속엔 소박한 자부가 들어 있다. ‘우리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다.’ 대체 한 출판사의 식구들이 오랜 시간과 땀을 들여 만든 책을 <조선일보>에 ‘어여삐 여겨주소서’ 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정직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왔는가를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조선일보>에 책을 보낸다. <조선일보>가 일부 여론 영역에서 수세에 몰렸다는 오늘도 그들은 여전히 책을 보낸다. 달라진 건 그들이 <조선일보>를 옹호하며 책을 보내지 않고, 짐짓 <조선일보>를 비난하며 책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들이 짐짓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건 제 양식을 과시하기 위해서고, 그러면서 책을 보내는 것은 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서다. <조선일보>의 책 기사가 다른 신문을 모조리 합한 만큼 효험이 있음을 아는 그들은 제 책을 팔아먹기 위해 <조선일보>에 책을 보낸다. 책도 아닌 허섭스레기나 찍어대는 출판사에서부터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출판사는 물론, 진보 지성의 총본산을 자처하는 저명한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그렇게 한다.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가 그렇게 하고, <조선일보>와 끈이 닿는 한국의 거의 모든 저자가 그렇게 한다.
이오덕 선생과 세 번째 인터뷰를 했다. 두번의 인터뷰에 어리석은 질문이 많았기에 오늘은 주로 말씀을 듣자 했으나, 그는 근래 무리한 집필로 적이 고단해 보였다. 염려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며칠 전에 나온 두권의 책을 내게 건넸다. “신문 기사를 제대로 쓴 데가 없어요. 내가 서울 나가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전화로 몇 마디 물어보고 쓰고….” “찾아오겠다는 데는 없었습니까.” “한 군데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조선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싶어한다고 하길래 내가 <조선일보>하고는 안 한다고 했더니 그럼 편찮으셔서 안 한다고 하겠다고 해요.” “싱거운 사람들이군요.” “그냥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를 했어요. 전부터 선생님 책을 많이 읽고 존경한다고 그러면서 찾아오고 싶다고, 그래 난 <조선일보>와는 인터뷰 안 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치 이야기는 안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그 친구들 집요하지요.” “예, 그러면서 도무지 전화를 끊지 않길래 안 되겠다 싶어 그 얘길 했습니다.”
그 얘기란 이런 것이다. 지난해 말 이오덕 선생은 오랫동안 함께 어린이 문학과 우리말 운동을 해온 동료인 한 중견 출판사 사장에게 ‘앞으론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 출판사 사장이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였다. 단지 <조선일보>에 글을 썼다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한다는 건 매우 편협하다 여겨질 만하다. 편협한 것은 대개 좋은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편협만이 바른 선택인 지점을 만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죄없이 폭행하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편협하다. <조선일보>가 바로 그렇다. <조선일보>엔 편협만이 바른 선택이다.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는 모든 출판사는 나쁘며,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는 모든 저자는 나쁘다.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며 책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말하지 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 가운데 <조선일보>에 보낼 건 단 하나, 구토뿐이다.
(<조선일보>를 욕하는 사람은 노무현 지지자거나 <한겨레> 소속이라 여기는 이들을 위해 굳이 덧붙인다. 나는 노무현 지지자들과 긴장을 이루며, <한겨레>에 칼럼을 쓰다 내용 문제로 잘린 바 있는, 나름의 급진주의자다.)김규항/ 출판사 야간비행 대표 gyuhang@nightfl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