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닷새쯤 머물 기회가 있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고딕지구의 구불구불한 길을 걸을 때나 구엘공원이나 퍼포먼스가 끊이지 않는 람블라스거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밤이면 또 다른 모습이 되는 바르셀로나의 야경을 보게 될 때, 소규모의 박물관들, 고서점들을 어디서나 마주치게 될 때 내가 탄식처럼 내뱉었던 말은 축복 받은 땅이네, 였다. 산과 바다(강이 아니라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바다라니!)가 같이 있었다. 어떤 처녀는 오전이면 버스를 타고 나와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고는 정오가 되기 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듯했다. 그 처녀는 오후에는 나무들이 우거진 몬주익으로 나가 내내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며 산책삼아 미로미술관에 들어가 웃음과 농담이 현란한 색채와 함께 날아다니는 듯한 선들을 만나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방인이 보기에 바르셀로나는 미적으로 파리에 뒤지지 않으면서 바다를 가지고 있고 물가가 싸고 사람들은 소박하고 음식이 맛이 있고 사방에 볼거리투성이였으니 어찌 질투가 없었겠는지.
바르셀로나의 거리는 매혹덩어리였다. 피카소와 미로 가우디가 먹여살리는 도시이기도 한 것 같았다. 구태여 무엇무엇을 찾아 길을 나서지 않아도 산책을 하다보면 눈앞에 가우디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일궈낸 식물 같은 건축물 앞에 저절로 가 있게 되었다. 멀리서 보아도 건물을 올려다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가가보면 그곳엔 건축의 시인의 흔적인 카사 바트요이거나 카사 밀라이거나 사그리다 패밀리아였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피카소가 왜 천재인가를 느낄 수 있는 피카소미술관이 있는 골목은 줄을 서 있는 사람들로 어깨가 치였다. 저녁식사가 늦기는 하지만 (식당문을 밤 9시에나 열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다 보면 람블라스거리가 아니더라도 사방에 발길을 붙잡는 가게가 있었다. 들어가보면 미로의 작품들을 소재로 해 만든 도자기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그리고 세련되게 재구성되어 있는지 그것 구경하다 보면 자정이 훌쩍 지나기 일쑤였다. 미로를 비롯하여 피카소와 가우디는 찻잔이며 접시며 가방이며 항아리며 거울 하다못해 휴지에까지 접목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그릇이 그에 비해 뒤떨어지는 까닭이 피카소와 미로 가우디가 없어서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몇몇 광장에서는 일요일 저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르다나를 추었다. 사르다나는 민족혈통의 결집을 서로 확인하기 위해 만든 의식이라고 한다.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는 방이 모자랐던지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날 옥탑방을 내주었다. 마침 일요일 저녁이었다.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요란해서 거리로 향해 나 있는 창을 통해 내다봤더니 카테드랄의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사르다나를 추고 있었다. 사르다나는 서로의 손을 잡고 원을 만들고 풀고 다시 만들고 풀고 하는 행위가 계속되는 춤이다. 오랜 세월 침략과 억압을 겪어내면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사르다나를 추며 서로의 혈통을 확인했다고 한다. 원이 계속되는 한 함께할 동료가 있다는 연대감의 표시인 셈이다. 아마도 그 연대감이 스페인 내에서도 바르셀로나는 다른 나라라는 느낌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누군가 인간의 여행이 계속되는 것은 언젠가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스페인은 여기에서 이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겠다, 싶은 장소과 풍경에 자주 마주쳤다. 투우장에서 마타도르가 진짜 소의 숨통을 끊는 걸 보고 그 피비린내에 기겁을 하긴 했어도 프라도미술관에서 본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비롯한 검은 그림 앞에서는 정신이 번쩍나 숨을 죽였다. 세비아의 플라멩코를 볼 적에는 무희의 카리스마에 전율했고 무어왕국의 마지막 요새였던 알함브라 궁전이 고요 속에 간직하고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 앞에선 말을 잃었다. 이 모두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의 마음이었기에 더 충돌했을 것이다. 돌아와서는 일주일째 줄곧 잠을 잔다. 그만 깨어나야겠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