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게 영 탐탁찮은 게이머가 하나 있다. 그는 점 두어개로 이루어진 마리오가 모노톤 화면을 뛰어다닐 때부터 평면을 입체로 볼 수 있는 신기한 기술을 익혀왔다. 현란한 카메라워크의 풀 3D 화면은 어지럽고 멀미가 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머리가 몸보다 더 큰 SD 캐릭터가 탄생한 건 사실 기술적 한계 때문이었다. 몇 안 되는 도트로 캐릭터의 표정을 표현하려니 머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짧은 팔다리를 버둥대며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모습은 새로운 캐릭터성을 가져왔다. 그는 이등신 혹은 삼등신에 어울리는 커다란 눈망울의 깜찍한 캐릭터들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이 기술 진보라는 미명 아래 추악하기 그지없는 괴물로 바뀌어버렸다.
그건 아마도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게임기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던 것 같다. 3D의 길로 가기로 결정한 제작사들이 우선 참고한 게 게임기보다 3D 경험이 많은 구미 PC게임이다. 미국 게임에서는 캐릭터 외모를 다듬기보다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많지 않은 폴리곤을 몽땅 쏟아부어도 충분히 보기 흉했을 캐릭터들이 더 괴상한 모습이 되었다. 동영상과 게임의 괴리가 충격적이었던 <패러사이트 이브>는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그를 자리에 눕게 만들었다.
과연 이대로 게임계를 떠나야 하는가? 방구석에서 자리보전하던 그에게 어느 날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비쳤다. 귀여운 캐릭터 없이는 살 수 없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달에 가고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하더라도 사람들이 갈구하는 건 귀여움이다. <마알 왕국의 인형 공주> 같은 2D 베이스의 게임이 다시 튀어나오는 한편, 텍스처 사용이나 로 폴리곤으로 3D라도 귀여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려는 다양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3D의 광풍 속에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의 기념비적 작품이 2D와 3D를 조화시킨 <그란디아>나 <파이널 판타지9>이다. 그러나 한계는 여전했다. 튀는 도트, 배경과의 위화감 등 여전히 2D 세계의 귀여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다음 단계로 등장한 게 바로 렌더링 기술에 대한 연구다.
렌더링이란 쉽게 말하자면 뼈대 위에 무늬가 그려진 종이를 붙여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종이의 무늬, 즉 텍스처를 정교하게 그리면 폴리곤을 적게 쓰더라도 꽤 정교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플레이하는 게이머 입장에서는 최종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렌더링이 구현할 수 있는 폴리곤 못지않게 중요하다. 실험적 렌더링 기술이 인상깊었던 게임이 세가가 만든 <젯 셋 라디오>다. 3D 캐릭터에 마치 2D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효과를 입혀 2D와 3D의 장점을 둘 다 살려낼 수 있었다. 단지 전반적 분위기가 귀여움보다는 쿨한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긴 했다.
한번 봇물이 터지자 만화 같은 느낌을 살려 이전 2D게임이 보여줬던 귀여움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쏟아져나왔다. <포포로크로이스 처음의 모험>은 3D면서도 1편의 2D 때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냈고, <다크 크로니클> <브레스 오브 화이어5> 등도 전작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릴 예정이다. 게임의 신세계를 열었던 3D가 10여년 만에 다시 2D가 이뤘던 성취를 재현하는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우회와 노력의 목적은 물론 게이머의 판타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길이 있다. 결국은 귀여운 게 이긴다.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