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대종상에서 기술분과 시상식은 있었지만, 스틸부문은 없었어. 91년에 드디어 스틸 시상이 있었고, 내가 그 첫 번째 수상자가 됐어. 영광이었지. 드디어 아내 볼 면목이 생겼구나 했지. 이듬해 영상자료원의 협조로 고희 기념 사진전을 열었을 때, 시작 테이프를 끊기 전 아내가 내게 한마디 하더군. “평생을 바치시더니 결국 하나 이뤘구려.” 그 순간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데 북받쳐올라 말이 안 나오더라고. 돈이 없어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야 할 때가 수시로 닥치고, 외상 인심이 좋아 한 동네를 35년간 떠나지 못하면서도 아이 셋을 대학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내 덕분이었어. 그런 아내에게 뼛속 깊이 감사하지. 언젠가 참다 못한 아내가 그만두고 차라리 막노동을 하라고, 그러면 지금보단 낫게 생활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한 적 있어. 그런 아내에게 부아가 치밀고 화도 났지만, 도저히 영화판을 떠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부아였는지도 몰라. 그렇게 힘든 데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보단 ‘이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더 강했어. 그래서 영화의 마력이라고 하는 걸까. 화천공사에 다니던 시절, 아이들 등록금 시즌이 닥치면 회사서 가불을 받았지. 한달에 400만원은 너끈히 들어가는 통에 가불이 없었다면 빚잔치를 벌여야 할 판이었어. 내 사정을 너무나 빤히 잘 알고 있는 회사의 도움이 그때 얼마나 큰힘이 되었는지. 이후 화천공사서 씨네시티라는 극장을 개관한다고 하기에 무료로 전시회 이벤트를 개최하는 걸로 감사를 표했어.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순간이 닥치게 마련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거잖아. 나의 경우엔 보잘것없더라도 나의 능력의 반을 남에게 주고, 그 대가로 남의 힘을 빌리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내 것을 주고 남의 것을 받는 거지. 그런 식으로 지금껏 살아온 거야.
촬영에 임했던 작품은 거개 스틸을 챙겨놨지만, 초기 몇 작품에 한해 스틸이 비는 경우가 있어. 주로 감독이나 영화사가 가져갔다가 돌려주지 않아서였지. 그건 나에게 필름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기 때문이야. 여태까지의 스틸을 간직할 수 있었던 건 내 주머니를 털어 사진을 찍었기에 가능했어. 초기엔 회사서 필름비를 타서 썼더니, 스틸은 물론이고 네거필름까지 고스란히 회사 소유가 되더라고. 그런데 회사서 그 필름을 잘 보관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폐기처분되거나 분실되는 사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 홍성기 감독과 두 작품을 같이했지만, 스틸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춘향전>(1961)을 찍고 나서 홍 감독이 “백 기사 사진 찍은 거 좀 내놔 봐” 하고 가져가더니 잃어버렸는지 누굴 줬는지 수중에 남은 게 한장도 없다더라고. 그때 결심했지. 사진을 모아야겠다고. 시간이 지나면 역사적 자료가 될 소중한 사진을 어여부영 잃어버리게 하지 말자고. 가끔 광고용이나 지금과 같이 인터뷰 기사에 딸린 자료 사진으로 영화스틸을 찾는 이가 있어. 나야 한 작품 끝내고서 네거티브 필름과 함께 스틸을 박스에 담아두기 때문에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근데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받기도 해. 받아갈 땐 “소중한 자료니만큼 잘 쓰고 갖다드릴게요” 하면서 나중에 물어보면 그만 잃어버렸다고,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쉽게 돌아서지. 자료 보관에 대한 개념이 투철하지 않은 것보다 사진 한장의 값어치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거지. 값어치란 돈을 말하는 게 아냐. 그 사진에 담긴 현장의 분위기,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장면, 그리고 스틸을 보관하는 사람이 들인 노력들을 좀 생각해 달라는 거지. 그리고 소중하게 여겨달라는 거야.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일을 하는 사람은 흔히들 말하지. 영화에 한번 미치면 굶어도 발을 빼지 못한다고. 아마도 내 경우가 그럴 거야. 어려웠던 시절, 밥벌이도 제대로 안 되는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어 온 내 자신이 때론 이해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러다가도 이내 욕심이 생겨. 나이가 구십을 넘고, 백살이 될 때까지 꾸준히 사진전을 열어 지기들을 모셔놓고 영화의 추억과 미래를 얘기하고 싶다고. 나 욕심 많지?
그동안 내가 받아두었던 대본들과 포스터, 그 밖의 영화행사 프로그램, 연감, 영화 관련 잡지 등 자질구레한 것까지 모아두었는데, 언젠가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다 줄 거야. 혹시 옛날 영화 자료나, 현재까지의 한국영화 역사가 궁금하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특히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영화를 연구하는 직업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모아둔 자료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존재가치를 찾을 테니까. 지금까지 읽느라 고생 많았어. 다음에 또 보자구. 구십살 전시회 때, 백살 전시회 때 말야. 하하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
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