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샬라> 이후 5년 만에 세 번째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찍고 있는 <개같은 날의 오후>의 이민용 감독을, 촬영지인 전북 김제 모악산 자락의 수류성당에서 만났다. <보리울의 여름>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신부(차인표)와 수녀원장(장미희), 성당에 사는 고아들, 절의 스님(박영규)과 그가 출가 전 낳은 아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과 할아버지들이 축구를 매개로 갈등에서 화합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월드컵과 무관하게 준비됐지만 우연히 축구 붐과 맞아떨어져 축구영화라고 주로 알려진 휴먼드라마다. 이민용 감독이 지난 5년간 준비했던 <신들의 휴일>이나 <폭풍> 같은 2편의 작품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하고 작은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이민용 감독에게 중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영화가 잘되면 그때 들으려고 <인샬라> 영화음악 CD를 5년 동안 뜯지도 않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 <보리울의 여름>은 깡패영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조금씩 더 작고 진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가는 충무로의 조류에도 어울리는 작품으로, 이민용 감독의 ‘재기작’이 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터뷰에 앞서 티셔츠를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고 모자도 찾아 쓴 이민용 감독.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 감독은 진지하고 행복해 보였다.
시골 마을 신부와 스님을 이야기하자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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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감독 중에 장화영이라고 있다, 을 만든. 어느 날 둘이 술 한잔 같이 하는데, 장 감독이 “시골마을에서 신부와 스님이 만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이야기하면 어떻겠냐. 형이 하면 잘하겠다”고 하는 거다. 난, “니가 하면 잘할 것 같은데” 했다. 그냥 그땐 그러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해 전쟁영화 준비하다가 너무 돈이 많이 들어가게 생겨서 보류를 하고 난 뒤, 올 여름 금방 기획해서 할 수 있는 걸 하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 예전에 장 감독한테 들은 아이템이 생각났다. 친하게 지내는 이미례 감독의 홍천 집에 가족휴가를 가서, 조감독과 함께 바로 이 영화의 구성안을 짰다.
준비했던 전쟁영화라면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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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다. <인샬라> 망해먹고 나서 <신들의 휴일>이라는 작품을 4년 동안 준비했었다. 이 사회를 잘못 이끄는 사람들을 테러단이 응징하는, 장르로 치면 소셜 스릴러였다. 그 작품을 접고서, 6·25 전쟁을 소재로 한 <폭풍>이라는 영화를 준비했다. 6·25 때 북한의 남침 공격명령어 ‘폭풍’에서 제목을 딴 전쟁영화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써놓고 보니까 이게 100억원 내지 200억원은 들겠더라. 아무리 육해공군 지원을 다 받는다 해도. 현실적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무 대작만 준비하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작은 것에 마음이 기울어 일단 <폭풍>은 보류하고 이 작품을 기획했다.
‘보리울의 여름’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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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제목을 생각하는데, 홍천 지방에 보리울이라는 마을이 있던 게 떠올랐다. 강원도가 대부분 감자농사를 짓는데 그곳만 유독 보리를 키우는 마을이다. 이름도 예쁘고 해서 땄다.
이 영화에는 신부와 스님의 이야기 속에 축구가 중요한 구심점으로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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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마을에서 신부와 스님, 두 사람을 어떻게 만나게 하고 대립하게 하고 경쟁하게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도입한 게 축구다. 성당에 사는 고아들에게 신부가 축구를 가르치고, 또 마을의 아이들에게는 스님이 축구를 가르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만나지고 얽히지 않겠는가.
대립이라니? 그냥 잔잔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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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가운데 대립과 갈등이 있다. <보리울의 여름>은 김 신부가 시골버스를 타고 보리울에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버스에는 8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우남 스님이 출가 전 얻었던 아들 형우도 타고 있다. 정류장에 이들이 내리고, 형우는 마중나온 아버지 우남 스님과 만난다. 그리고는 마을초입 구멍가게에서 우남 스님과 김 신부가 같이 음료수를 먹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시비가 시작된다. 호방하고 시골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우남 스님은 이때 승복 대신 러닝셔츠 차림인데, 로만칼라 차림의 김 신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로만칼라, 그거 되게 덥겠네? 차라리 로만폴라라 해야 하지 않아?”라고. 이들간에는 뭐 이런 식의 기싸움이 있다. 그게 축구시합으로 이어지고….
‘축구영화’라고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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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월드컵 때 한국팀이 1승할 때마다 사람들이 축하전화를 내게 하더라. “축구영화 준비하고 있다던데, 잘됐다”면서. 사실 나는 단순한 스포츠영화는 싫다. 그런데 나중엔 축구 붐이 이는 게 싫지 않아지더라. (웃음) <보리울의 여름>은 단순한 축구영화는 아니지만 축구의 다이내믹함은 들어 있는 작품이다. 사실 처음에는 잔잔하기만 하고 큰 사건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 시나리오는 꽤 여러 군데의 제작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이른바 ‘야마’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나랑 이만희 작가의 의도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설정 속에 모든 것들이 더불어지고 믹스가 되게 하는 것 말이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테마를 찾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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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제는 화합과 희망이다. 보리울은 전라도로 설정돼 있고, 우남은 부산사람으로 설정돼 있다. 성당에는 집없는 아이들이 있고 마을에는 집있는 아이들이 있다. 천주교가 있고 또 불교가 있다. 우남 스님과 김 신부가 대립하는가 하면, 원칙적인 원장 수녀와 자유로운 김 신부가 대립한다. 원장 수녀와 김 신부의 대립은 크게 보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경우에, 성당의 아이들과 마을의 아이들이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여기엔 또 보리울을 촌구석이라고 업신여기는 읍내 아이들과 보리울 아이들의 대립이 있다. 나중에 성당 아이들과 마을 아이들이 단일팀을 만들어서 읍내팀과 시합을 한다. 그런 식으로 점차 여러 가지 요소가 화합을 이루어 간다. 그러는 와중에 우남 스님과 김 신부와 원장 수녀, 이 세 사람간의 갈등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생겨난다. 비교하자면 <컵>보다 에피소드가 풍성한 영화이고, 캐릭터들의 관계를 살피는 게 관람 포인트가 되겠다. 우남 스님이 8년간 떨어져 있던 아들 형우와 만나가는 이야기줄기에는 휴머니즘적인 요소도 있다.
<개같은 날의 오후>와 <인샬라>가 달랐듯 전작들과 또 아주 다른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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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야 다 다르다. 준비했던 <신들의 휴일>은 소셜스릴러였고 <보리울의 여름>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얘기고…. 하지만 난 다 똑같은 것 같다. <보리울의 여름>은 <개같은 날의 오후> 시나리오 쓸 때와 굉장히 유사한 느낌이다. 한을 기로 풀어버린다고 할까. 그런 차원이 있고, 한두명 특별주연보다는 공동주연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인샬라>는 원작소설이 있었기 때문에 좀 경우가 다르다.
시나리오를 희곡작가로 유명한 이만희씨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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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에 구성안 작업하러 가면서 <신들의 휴일>을 함께 했던 이만희 작가에게 연락을 했다. 이러이러한 내용이다, 했더니 “내 몫이다”라고 하더라. 이만희 작가는 여기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서 중으로 지내다 파계를 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하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의 경험이 이 영화를 그의 ‘몫’으로 여기게 한 것 같다. 이만희 작가의 시나리오가 매우 만족스럽다. 그동안 나는 작가와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쓴 초고에 보충할 게 있나 보여주는 식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번은 처음으로 작가와의 작업이 만족스러운 경우다. 이 영화는 가히 ‘보리울과 이만희의 만남’이라 할 만하다.
이곳 촬영지는 어떻게 발견했나. 성당과 절, 초등학교가 가까운 거리 안에 있어 촬영하기에 아주 적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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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먼저 찾아야 했다. 산자락에 있는 전원풍경의 성당을 찾기 위해 몇달 동안 천주교 교구에서 자료를 받아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곳 수류성당도 목록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먼저 간 곳은 충청도와 강원도였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예전에 이만희 작가와 변산반도에서 <신들의 휴일>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때, 금산사 근처에 와서 메기매운탕 먹던 생각이 났다. 그 김에 김제에 들러 매운탕을 먹고 하룻밤을 김제에서 잤는데, 성당 목록에서 김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보니 수류성당이더라.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자 해서 찾아가는데, 산 속으로 길이 깊이 들어가기에 기대가 됐다. 그런데 그 길에 풍광이 좋은 초등학교가 있더라.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는데 하얗게 닳아빠진 축구공 하나가 운동장에 덩그러니 있었다. 그걸 보고 성당으로 왔는데, 거기 잔디밭에 그 똑같은 축구공이 또 있는 거다. 뭐 인연인가 싶었고, 성당의 구조며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영화에 수녀지만 팩도 하고 밤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란제리를 입고 자는 좀 푼수 젊은 수녀가 나오는데, 시나리오에 아이들이 교회 종탑에 올라가 수녀 방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가서 그 수녀의 풍만한 몸을 훔쳐보는 설정이 있다. 그런데, 이 성당이 마치 세트를 지은 듯 바로 그런 내부구조를 갖고 있어서 놀라웠다. 절은, 지나가는 우편배달부에게 물어 후보를 정했다. 5개의 후보지 중 2번째로 찾아간 곳이 귀신사였고, 역시 마음에 들었다.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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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우 자신의 성품이 캐릭터와 맞는 게 좋다. 차인표는 반듯하고 가지런한 게 평소에도 신부 같다. 원장 수녀는 보수적이고 원칙적이나 속마음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캐릭터다. 장미희 선배가 그렇다. 원장 수녀처럼 마음이 예쁘고 또 혼자 수녀처럼 살아온 삶도 있다. 우남 스님은 땡중이면서 선불교적인 깨달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러기 위해선 쌈마이에다 카리스마를 겸비한 이미지가 필요했다. 박영규는 대중에게는 미달이 아빠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지만 연극 시절부터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처음 자신이 잘했던 연기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 역시 실제 삶에서 우남과 비슷한 것을 겪는 점도 있고.
5년 만에 현장에 복귀한 소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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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샬라> 이후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한시도 영화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샬라>의 실패는 나의 무능도 있겠지만 열악한 상황 탓도 있었다. 나의 애간장은 그때 다 타고 없어졌다. 이미 많은 반성을 했고, 이제 비로소 감독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수업료로 돌리기에는 큰 상처이지만. 이제는 좀더 큰 욕심과 장악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5년은 감사함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편안한 마음이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