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세계의 7대 불가사의>는 아주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였다. 1633년 루이 13세가 임명한 뵈시우스 대사가 교황 우르반 8세의 허락하에 교황청에 있는 도서관의 책을 열람하다가, 우연히 필론이라는 이가 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는 6장짜리 글을 발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부터가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게다가 아직도 남아있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비롯해 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 신전, 할리카르낫소스의 마우솔루스왕 능묘, 로도스의 거상, 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의 등대 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독특한 해석은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라져버린, 그리고 공포스러운 느낌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그 불가사의들보다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은, 바로 외계인과 관련되어 있는 미스터리들이었다. UFO나 버뮤다 삼각지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싸인>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크롭 서클(Crop Circle) 역시 그중 하나였다. 고대의 거석 문명의 유적지 근처나 UFO 출몰지역에서 자주 나타나고, 그 모양이 고대 켈트족 문명이나 고대 인도 문명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문양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그 선명한 항공촬영 사진들과 함께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외계인이 무언가 지구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남긴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기는 했지만, 2000년마다 한번씩 지구에 나온다는 악마에 관한 고대인들의 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어떤 의식이라는 등 색다른 해석이 있었던 것도 짜릿함의 강도를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크롭 서클이 UFO의 흔적이라거나 악마숭배자들의 의식이라거나 하는 주장들을 일거에 부정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스스로를 ‘크롭 서클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다. 크롭 서클들을 그저 ‘밭 위에 그린 낙서’로 규정하는 그들은, ‘어떤 크롭 서클이든 간에 하룻밤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지 못할 것은 없다’라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이는 것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쯤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대부분의 크롭 서클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 시작은 영국 햄프셔에 살고 있던 더그 보어와 데이브 콜레이라는 두 노인 예술가들의 실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 두 사람의 ‘예술작품’을 외계인과 결부시키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 때문에 오히려 모방 범죄(?)가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지난 7월18일 영국의 윈드밀 힐에서 발견된 크롭 서클. 최근에 발견된 것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 발견된 다양한 모양의 크롭 서클들.♣ ‘크롭 서클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트를 운영하는 존 룬드버그와 로드 디킨슨.
그들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크롭 서클을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크롭 서클을 만들 밭을 선정하는 것. 당연히 도로보다 높은 곳이나 분지형태로 되어 있는 곳이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크롭 서클을 만드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범죄행위인데다가 이미 많은 농가에서 그 범죄행위를 적발하기 위한 관리인을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대한 작업도중 들킬 염려가 적은 곳을 택해야 하는 것. 실재로 농작물들을 쓰러뜨리는 작업을 위해서 30m짜리 줄자와 2m 정도 길이의 긴 나무판 그리고 긴 줄과 50cm 정도되는 나무막대 등의 간단한 도구를 준비한다. 그리고 크롭 서클을 그려나가기 시작하면 되는데, 서클들의 시작점은 항상 트랙터가 다니기 위해 만들어놓은 길 근처여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만약의 경우,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 영국 TV <채널4>의 요청으로 크롭 서클을 만들어주고 있는 ‘크롭 서클을 만드는 사람들’의 회원들.♣ 크롭 서클을 만드는 대표적인 도구
재미있는 점은 그런 식으로 몰래 만든 크롭 서클들을 최대한 UFO나 밀교단체들과 연관되어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잡히지 않는 것. 만약 현장에서 적발되면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고, 모든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을 법한 모양으로 크롭 서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달라나 아틀란티스의 문자 같은 것들을 책에서 본뜨면 효과는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 조금 더 용기가 있다면, 작업도중 특이한 불빛을 발할 수 있는 도구나 특정한 음색을 낼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면 효과가 만점일 수 있다. 주민들이 이상한 불빛과 소리에 대한 증언을 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 마지막으로 크롭 서클을 연구하는 단체인 ‘Centre for Crop Circle Studies’(CCCS)의 지역 담당자가 사는 곳에서 가까울수록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까지의 정보만 가지고서는 정말 ‘크롭 서클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그 멋지고 신비한 크롭 서클들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영국 TV <채널4>의 게임 쇼 로고나 미국의 <히스토리 TV>의 로고를 만들어내는 모습과 그 결과물 사진을 그들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나면, 더이상 크롭 서클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현상일 것 같다는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도 수백개씩 나타나는 크롭 서클이 최근에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물론 여전히 남는 의문은 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재미 또는 취미로 크롭 서클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화 <싸인>을 계기로 당분간 크롭 서클의 제작(?)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더 늘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크롭 서클을 만드는 사람들’ 홈페이지
--------→ http://www.circlemakers.org
<싸인> 공식 홈페이지
--------→ http://bventertainment.go.com/movies/signs/
<세계의 불가사의> 홈페이지
--------→ http://www.misterynemo.wo.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