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두의 형은 일장연설을 한다. 너도 이제 어른이 돼야지. 자기 행동에 책임도 지고, 남들이 널 어떻게 보는지도 좀 생각해 보고. 맞다. 어른은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늘 따져본다. 체면이나 과시욕 같은 것들도,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생겨난다. 종두는 그런 ‘시선’ 같은 것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질주한다. 원인도, 결과도 없다. 무작정 가고, 사고를 치고, 모른 척한다. 종두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그런데 <오아시스>를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도 든다. 혹시 종두는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저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두의 가족은 과연 그를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공주는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로 말을 하기도 힘들다. 공주의 가족은 그녀를 동정하고 보살핀다. 직접 하지는 않고 옆집에 20만원을 주고 맡긴다. 그래도 생일이 되면 케이크를 들고 오고, 가끔씩 들러보기도 한다. 그들에게 공주는 조금은 귀찮은, 동정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동등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공주는,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다. 옆집 부부는 공주의 집에 들어가 사랑을 나눈다. 그 사랑은 추악하지 않다. 노모와 아이들의 ‘눈’을 피해 공주의 집으로 온 그들은, 공주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공주가 내다보는 것을 알고도, 그냥 ‘들어가’라고 한마디한다. 침대에 올라앉은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건네듯.
(딱히 계산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종두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한다. 청계천 고가도로가 막힐 때, 종두는 공주를 안고 자동차에서 내린다.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춘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는 세상의 그 누구도 못할 행동을, 종두는 과감하게 저지른다. 그것이 종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무시당하는 종두만의 행동방식이다. 공주 역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아니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신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만도, 공주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종두가 처음 공주를 본 날, 공주는 거울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그녀는 거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거울에 반사되는 빛을 종두의 눈에 비친다. 그리고는 거울을 깨버린다. 조각난 거울에 비칠 공주의 얼굴이, 그녀가 보는 자기 자신이다. 타인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시선조차도 깨지고 굴절되어 있다. 그래서 공주는 꿈을 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나비로 변해 춤을 춘다. 종두와 함께 있을 때 그녀의 상상은 그러므로, 꿈이 아니다. 공주에게 그것은 현실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날마다 라디오를 듣던 그녀에게 꿈은 곧 현실이다. 그 안에서, 타인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공주나 종두나, 우리 사회의 바깥에 존재한다. 변두리도 아니다. 시스템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만큼 멀리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전과자와 장애인의 사랑을 보는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특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건 공주의 오빠나 경찰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은 종두에게, 쟤를 보고도 이게 서냐? 너 변태지? 라고 지껄인다. 그건 짐승을 보고도 욕정이 생기냐고 묻는 것과도 같다. 뇌성마비로 온몸이 뒤틀리는 장애인 여성을 보고도 욕정이 일고, 사랑을 느끼는 남자는 정상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그것이 경찰의, 공주 오빠의, 종두 형제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종두와 공주가 서로를 사랑하여 섹스를 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사람이 아니므로.
종두와 마찬가지로, 이창동 감독은 단 한번도 변명하지 않는다.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이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람들의 삶을 다시 한번 지켜봐야 합니다, 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이창동 자신이 종두와 공주를 따라가서 보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게 만든다. 그들은 전과자이고, 장애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이유로 나는, <오아시스>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의 내레이션 따위는, 공주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의도가 어쨌건, 나는 그 장면이 공주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화사하고 따뜻한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두와 공주의 사랑이 화목하게 이루어질 세상이라면, 우리는 <오아시스> 같은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꽤 오랫동안,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다시 보게 만든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오아시스>가 나에게 ‘절실한’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게다. <오아시스>는 위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오아시스>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잡아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일깨워주고, 비열한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하기 때문에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아니 나 자신이.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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