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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 아로새겨진 강렬한 슬픔, <바보선언>
2002-08-22

1983년, 감독 이장호 출연 이보희, 김명곤, 이희성때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마도 가을 체육대회 날이었을 것이다. ‘질풍’과도 ‘노도’와도 전혀 관계없었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던 나와 친구 몇 녀석. 운동 잘하는 놈들만의 잔치였던 체육대회 따위는 우리 반이 지든 이기든 관심없었다. 단지 수업 안 하고 일찍 끝나서 영화 한편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이겨라’를 외쳤을 뿐이었다.

그날 학교 앞에 있던, 지금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뀐, 세일극장으로 우린 영화를 보러 갔다. 제목은 <차이나타운>. 아시는 분들만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그 유명한 영화가 아니라, 미국을 배경으로 동포아이들이 갱들과 벌이는 싸움을 다룬 국산영화였다.

그 당시 나와 친구들을 열광시킨 것은 액션영화였다. 그것도 치고박고 죽이고 폭발하는 ‘아주 단순한’ 액션영화. 애들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됐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선두주자는 당연히 성룡-홍금보-원표 트리오였고(그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동두천까지 원정갔었다), 그 뒤를 실베스터 스탤론(괜히 교실 뒤에서 한손으로 팔굽혀펴기 하고), 아놀드 슈워제네거(그 요상한 이름 가지고 다투고), 그리고 척 노리스(좀 한심한 생각이 들긴 한다!) 등이 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이상무 아저씨 문하생으로 들어갈까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만화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만화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오로지, 위에서 말한 액션영화에! 일찍이 최배달과 이소룡을 ‘제멋대로’ 스승으로 삼고, 달밤에 마당에 나와 계통없는 발차기 등을 연마하던 이력이 있던 나였으니, 액션영화에 빠져든 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차이나타운>은 우리 단순한 액션영화팬들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시상영의 다음 영화였다. 제목은 <바보선언>. 한국영화는 보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깔보던 우리는 참 ‘후지고’ 요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내내 비가 내렸다. 그것도 폭우가. 그렇게, 사운드도 영상도 좋지 않은 형편없는 프린트였다.

그런데 그 영화에 나는 금세 포박되고 말았다. 그것은 기이한 체험이었다. 영화는 난센스하고 엉뚱하며 이해부득이었지만, 나는 어떤 감정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슬픔∼ 비스무레한 것이었다. 두 남자가 비 내리는 청량리역을 향해 달려갈 때, 또 죽은 여자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 푸른 언덕에서 장례를 치를 때, 내가 눈물을 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의 분노와 슬픔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폭우 속에서.

그날 <바보선언>을 보고 난 뒤 나는 내 인생을 영화에 걸기로 맹세했다, 라고 쓰면 꽤 폼나겠지만, 그뒤로도 나는 계속 액션영화에 정진했다. 두번의 도전 끝에 영화과에 입학할 때까지도.

그뒤, 나는 많은 영화를 보았고 또 그만큼 많이 변화했다. 특히, 영화가 사회와 갖는 관계와 영화라는 장르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서. 하지만 좀 폼잡는 게 용서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들은 바로 <바보선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것은 불현듯 찾아와 내 영혼에 어떤 강렬한 ‘자취’를 남기고 사라졌고, 나는 그 자취와 슬픔의 근거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고. 그때는 몰랐었지만, 돌아보니 내 세상탐구를 이끈 등불이었노라고.

나는 여전히 액션영화를 좋아한다. 역동성이라는 범주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걸 별로 즐기지 않지만 문득, 그립다. ‘그 <바보선언>’뿐만 아니라, ‘그 <차이나타운>’까지. 온 존재로 영화를 보던 그 시절이. 제길,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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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진완/ 시나리오 작가<피도 눈물도 없이> <품행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