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인 이제마 / KBS2 수 ·목 밤 9시 50분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취향은 참으로 변덕이 심하다. 똑같은 장르, 똑같은 주제라고 해도 어제와 오늘의 선호도가 다르다. 전편에서는 ‘신드롬’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열광하던 스타에 대해 다음 드라마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담해지는 것이 요즘의 시청자다. 하지만 이렇게 오락가락 예측할 수 없다고 해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래도 일정한 경향의 기호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의학 드라마의 편식 현상이다. 묘하게도 최근 들어 이른바 ‘메디컬 드라마’보다 한방의학을 소재로 한 사극이 더 인기가 높다. 물론 MBC <종합병원>이나 <의가형제> <해바라기> 같은 대표적인 메디컬 드라마는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청률이란 기록만 보면 방송사에서 ‘국민 드라마’라고 자랑했던 <허준>의 평균 50%가 넘는 수치를 능가할 수가 없다. 시청률을 떠난 언론의 영향력이나 화제성을 따져도 앞서 언급한 메디컬 드라마보다 <동의보감> <허준> 그리고 지금 방송하고 있는 KBS2TV <태양인 이제마> 등이 더 뜨겁다.
의학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이 서양의학이든 동양의학이든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연기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난해한 전문용어, 소품팀이나 세트팀을 진땀나게 하는 정교한 상황묘사, 그리고 매회 시청자의 긴장과 흥미를 유도하는 다양한 사건의 발굴 등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 많다. 얼핏 단순하게 생각하면 현대적 의학기기와 현란한 의학용어를 구사하며 하얀 가운을 펄럭이는 현대극이 시각적으로 화려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사극에 더 열광할까?
8월 들어 시작한 KBS2TV의 새로운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는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태양인 이제마>는 냉정히 보면 드라마적으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작품이다. ‘동의보감’의 허준에 비해 주인공인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지긴 했지만, 기본적인 플롯이나 인물설정, 주인공들의 성격은 이전에 방송했던 사극과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허준>과 유사한 내용이라는 네티즌의 입방아에 올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지금도 식지 않고 따라다니고 있다.그런데 드라마로서는 어찌보면 치명적인 단점일 수도 있는 이러한 특징이 시청률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태양인 이제마>는 MBC의 <네 멋대로 해라>와 SBS <순수의 시대> 등 젊은 감각에 맞춘 드라마를 제치고 20%가 훌쩍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닮았다’라는 약점이 여기서는 ‘친숙하다’란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한방 사극’ 시청자들의 묘한 특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솔직히 사람들이 <태양인 이제마>에서 기대하는 것은 섬세한 심리묘사나 기발한 구성이 아니다. 감정의 밸런스가 균형을 잘 이루고 당위성을 지닌 캐릭터도 아니다. 그보다는 난치병이나 희한한 증상의 환자들을 절묘한 의술과 시의적절한 처방으로 완치시키는 명의의 무용담을 보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는 등장인물의 관계나 캐릭터가 친숙한 것이 좋다. 괜히 드라마를 보면서 인물의 성격 파악하랴, 줄거리 이해하랴, 사건의 전후상황 파악하랴 복잡한 삼각관계의 멜로물 볼 때처럼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아! 저 증상에는 이 약이 특효약이고, 내가 지금 몸이 이상한 것은 저런 증상이구나’라는 다양한 ‘임상사례’를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특히 <태양인 이제마>의 주인공 이제마가 창시한 사상의학의 근간이 무엇인가. 사람의 체질에 따라 병의 증상과 치료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상의학을 말로만 듣던 시청자에게 극중 병자와 자신의 몸 상태를 비교하는 기회를 제공하니 이보다 좋은 시청각 자료가 없다. 여기에 선악의 성격이 분명한 주인공들의 애정담까지 곁들여 있으니 금상첨화이다.
한여름 내내 땀흘리며 고생하는 연기자와 제작진에게는 좀 맥빠지고 열받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가끔 ‘이러한 시청자의 반응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아니 좀더 야박하게 말하면 기대하고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다양한 증상에 대한 자상한 자막설명과 대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의학적인 이야기들이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주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꼭 이런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가치란 결국 시청자의 관점에서 느끼는 것이지, 나처럼 옆에서 잔소리하고 트집잡는 입장에서 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서점가에 이제마와 사상의학을 다룬 책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람들이 새삼스레 자신의 체질에 대해 고민하는 요란스런 ‘후광 효과’(hallow effect)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허준이 나오고 이제마가 등장했으니, 다음에 남은 것은 한·중 합작으로 제작되는 중국 명의 화타의 이야기가 아닐까?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