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호에 이어) 이날은 <남자위에 여자>의 첫 장면으로 쓰일, 신부가 기다리는 선상결혼식장으로 신랑을 태운 헬기가 도착하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어. 촬영준비가 갖춰진 건 오후 4시가 다 돼서였고, 잠실선착장 하류 200m 지점인 한강 위로 헬기가 날아오르면서 촬영이 시작됐어. 당시 헬기에는 모두 8명이 올랐는데, 정원보다 조금 많이 탄 거지. 예정대로라면 당연히 나도 동승해서 스틸을 찍어야 했겠지만, 줌렌즈가 없어 먼 거리 촬영이 불가능했으므로 탑승을 포기했어. 사고가 난 건 이륙을 마친 헬기가 약 10여분가량 한강 상공을 두어 차례 배회하던 찰나였어. 촬영기사 손현채씨가 “앵글이 잘 잡히지 않는다”며 기장에게 고도를 낮춰달라고 부탁을 했던가봐. 근접촬영을 위해 수면 위 10m까지 고도를 낮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헬기가 기우뚱거리며 수직추락한 거야.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배우들과 스탭들은 할말을 잊었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어. 헬기는 처음부터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고, 기체가 어느 정도 수면 위로 보이는 상태였어. 잠시 뒤 헬기의 깨어진 창문에서 누군가 기어나오더니 구조를 요청했어. 나중에 보니 취재차 함께 탔던 KBS 프로듀서 김일환씨였어. 자기 발로 걸어나온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
다행히 세모유람선 보트구조요원들이 인근 선착장에 있다가 사고 현장의 김씨를 발견하고, 구조를 도왔지. 이어 사고신고를 받고 출동한 한강 순찰대 구조대원들이 몰려와 보트 2정에 나누어 사고자들을 건져올렸지만, 이미 5명은 목숨을 잃은 뒤였어. 조금이나마 의식이 있던 남자 주연 변영훈과 미도영화사 대표 이상언씨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으나 차례로 숨을 거두었어. 결국 살아난 사람은 제 힘으로 헬기를 탈출해 물 밖으로 나온, 해병대 출신의 김 PD밖에 없었어. 영화사상 현장에서 7명의 사망자를 낸 최악의 사고였지. 그때 선착장에서는 여자 주연 황신혜가 신부복 차림으로 신랑 역인 변영훈을 기다리다 사고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말았어. 목숨을 건졌다는 다행함보단 그녀에게 큰 공포와 마음의 상처를 남긴 일이었을거야. 나 역시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그저 멍하게 서 있다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부랴부랴 카메라로 현장을 담아나갔어. 헬기가 강물 위로 머리를 삐죽이 내밀고 서서히 가라앉던 장면은, 줌렌즈가 없어 작게나마 촬영해 놓은 게 있어.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져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을 남길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어. 비명횡사한 이들의 명복을 맘속으로 빌고 또 빌며, 울음을 삼켰지. 줌렌즈가 그날따라 왜 금이 갔는지 모르지만, 그걸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아.
헬기에 탑승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엔 김 PD와 일행인 백아무개 사진기사가 있었는데, 우리 집사람은 텔레비전에 촬영기사 백씨 사망이라고 나오자 내가 죽을 줄 알고 거의 실신하다시피 했어. 친척들과 이웃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안부를 전하러 전화를 건 나는 세 시간 만에 가까스로 집사람과 통화할 수 있었지. 그때 그 사람이 건넨 첫마디가 “아니, 당신 살아 있었어?”였어. 하긴 촬영헬기에 탄 촬영기사 백씨라면 누구라도 나를 떠올렸을 거야. 나조차도 그런 우연에 가슴이 떨렸지. 숨진 사람은 헬기 기장 최씨를 비롯해 영화제작자 이상언, 배우 변영훈, 촬영기사 손현채, 촬영조수 김종만, 기획실 직원 김성준, KBS 카메라맨 백순모씨였어.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 나서 한동안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두려웠어. 사고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그리고 크게 남았지.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즈음, 최수종과 오연수가 주연을 맡은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신승수 감독, 1992)에 투입됐지. 같이 일하던 스탭들과 배우들이 어리긴 했지만, 금세 친해져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일을 할 수 있었어. 그 작품이 공식적인 내 필모의 마지막인 듯했어. 그걸 끝으로 한동안 현장에 나가지 않다가 얼마 전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국방부 영화를 찍고, 다시 ‘부활한 현역맨’으로 돌아온 거지. (웃음) 나에게 끝이란 아마 현장에서 쓰러지는 날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게 끝이라면 아마 행복할 거야. 웃으면서 눈감을 수 있을 거야. 고희기념 전시회를 마치고 영상원에 자료를 기증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어. 40여년간 간직한 스틸이 방 하나에 가득히 들어차는 동안 “이것 좀 어떻게 버릴 수 없냐”고 구박을 하기도 한 그녀지만, 막상 스틸을 실으러 트럭이 도착하자 울먹이더라구. 솔직히 내가 없는 사이 스틸 박스들을 치워버렸대도 할말이 없었지만, 어느새 아내도 그 박스에 담긴 나의 정성을 알아서인지, 정이 들어서인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어. 꼭 잘 키운 딸 시집보내는 기분이라더군.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
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