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2002-08-16

그리고 할리우드는 먼로를 창조했다

1962년 8월5일 마릴린 먼로는 술과 수면제와 외로움에 취해 침실에서 삶을 마감했다. 100만달러 남짓한 부동산과 채 고치지 못한 유언장, 전남편 아서 밀러가 쓴 책들과 좋아하는 베토벤의 레코드가 그녀 뒤에 남았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사진을 찍어주면 어린애처럼 행복해하지만, 일할 때는 겁에 질렸다”고 회상했던 상처 많은 배우 마릴린 먼로. 그녀는 너무 젊어서 죽는다면 삶을 완성하지도,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거라며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가 완성하지 못한 삶은 위대한 배우라고 칭송받았던 그 누구보다도 오래 남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흘러다니고 있다. 올해 사망 40주년이 되는 먼로는 아직도 너무나 유명해 결코 쉴 수가 없는 것이다.편집자 이재현/ 문화평론가 21세기 넘어서까지 살아남은 말론 브랜도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추악하다. 망가져 있는 그들의 육체를 영화나 해외토픽의 가십난에서 보는 것은 목욕탕 대형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의 무너져가는 육체를 연민과 체념의 눈길로 보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뭐랄까, 환한 대낮에 극장에서 막 나왔을 때보다 수백배 증폭된 환멸감을 준다. 그에 반해, 서른여섯에 요절한 마릴린 먼로는 멍청하면서도 순진한 섹스 심벌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릴 적의 불행한 삶, 스타 탄생 스토리, 남성 편력과 염문,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의 내적 고통, 의문사, 사후에도 그칠 줄 모르는 인기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한데 얽혀 먼로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런가 하면, 먼로 자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는 점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오히려 그 말들로 이루어진 먼로이즘에 의하면, 그녀는 스타 이미지와 스타 육체를 착취하는 할리우드 시스템을 제대로 간파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영화사적으로 볼 때 먼로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먼로와 함께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부각된 브리지트 바르도와 비교해봐도 잘 알 수 있다. 로제 바딤의 1956년작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야말로 먼로가 출연한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다. 그렇지만, 먼로가 출연한 영화를 한편도 보지 못한 세대들도 먼로를 기억한다.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를 경쾌하게 내리누르는 먼로의 브로마이드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먼로는 통풍구 바람이 없었더라도 자신의 허벅지와 거들을 슬쩍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하얀색 홀터 톱 원피스를 올렸을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아이스께끼’(우리 어릴 때, 여자애들 치마 들춰올리는 일을 그렇게 불렀다) 이미지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다. 현실이 아닌, 전설 속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먼로가 내 몽정이나 자위의 극장에는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내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고 내 세대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먼로가 등장하는 영화가 1950년대 한국의 극장에서 몇편이나 상영되었는지, 그리고 관객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단지, 나는 70년대의 흑백 TV를 통해서만 먼로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70년대의 나는 먼로보다는 준 앨리슨이라든가 내털리 우드가 더 좋았다. ‘포스트콜로니얼’ 한국 남성의 일원인 나에게 이른바 백마의 환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먼로와 같은 글래머는 아무래도 부담스럽기도 했고, 먼로의 시대가 내 시대와는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때 <허슬러>나 <펜트하우스>를 애독하며 두루말이 화장지깨나 낭비했던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사람마다 갈린다. 1954년생 소설가 김영현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의 먼로가 한때 자신의 사춘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그럴듯하게 얘기하면서 먼로가 기타를 치며 불렀던 노래를 영어로 몇 소절 부른 적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먼로의 애교점이나 먼로 워크에 따라 흔들거리는 그녀의 엉덩이에 푹 빠졌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내 사춘기 시절에 먼로보다는 케네디의 미망인 재키가 더 충격적이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을 때의 이질감, 그리고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잡힌 오나시스 재키의 알몸 일광욕 사진 말이다. 불행히도 그 사진은 70년대 초반의 한국 신문 외신난에 아주 작고 희미하게 인쇄된 채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50년대의 미국 대중문화에 퍽이나 친숙한 타란티노에게는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영화 <펄프 픽션>을 보면 비록 엑스트라이기는 하지만 식당 종업원들이 먼로 차림을 한 채 여럿 등장하니 말이다. 팀 버튼에게는 어떨까. 마릴린 먼로 연보♠ 1926년 6월1일 캘리포니아에서 출생♠ 1950 <아스팔트 정글> <이브의 모든 것>♠ 1952 <멍키 비즈니스>♠ 1953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1954 <돌아오지 않는 강>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1955 ♠ 1956 <버스정류장>♠ 1957 <왕자와 쇼걸>♠ 1959 <뜨거운 것이 좋아>♠ 1960 <사랑합시다>♠ 1961 <미스핏>♠ 1962년 8월5일 사망먼로, 체 게바라, 그리고 파농의 시대

이렇듯 먼로와 나는 그다지 깊은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먼로는 다양한 텍스트 안에서 맥락이나 의미상으로 여러 형태로 연루되어 잔존한다. 우선, 먼로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콘의 주인공이며 그리고 먼로 못지않게 전설로 남아 있는 체 게바라 얘기부터 해보자. 게바라(1928∼67)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티셔츠나 그룹이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먼로와 동시대인으로 통한다. 체포된 게바라는 미 CIA요원이 재촉하는 가운데 사살되었는데 그의 죽음을 결정한 쪽은 먼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케네디의 후계자 존슨이 이끄는 행정부였다. 게바라보다 일찍 체포된 레지 드브레의 재판 결과가 미국과 볼리비아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게바라는 즉각적으로 사살되었다. 이렇듯 당시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 해방운동이 한창이었는데, 파농(1925∼61)은 워싱턴 근처의 병원에서 급성 백혈병에 겹친 폐렴으로 죽고 만다. 1950년대에 미국은 정치, 군사적인 강대국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기 위해 미국의 원조에 기대야만 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1950년대의 한국은 버마보다도 못사는 나라였다. 작고한 사진가 임응식이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 195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거지, 구직자, 전쟁고아, 영세 상인들이 대부분이다. 크리스 마커가 1950년대에 북한에 가서 찍은 사진들에 담긴 북한 사람의 차림새와 살림살이는 당시 남한에서도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제3세계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은 전후 호황 덕에 중산층의 경제적 부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반면에 냉전 체제하에서 1950년 무렵부터 불기 시작한 매카시즘 선풍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잘 알다시피 레이건은 그 시기를 틈타 출세했다. 당시 중산층 부모세대의 도덕은 매우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매우 불만이 있었으며 현저히 증가한 이들 10대의 소비를 바탕으로 로큰롤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50년대 말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이 시기 끝무렵, 즉 먼로가 사망한 1962년을 배경으로 미국의 10대 얘기를 다룬 것이 조지 루카스의 <아메리칸 그래피티>다.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1)

▶ 마릴린 먼로 사망 40주년,먼로는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나 (2)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1)

▶ 마릴린 먼로가 지상에서 보낸 서른여섯 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