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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족의 비범한 시트콤 <내 사랑 레이몬드>
2002-08-14

옆집에서 무슨 일이?

내 사랑 레이몬드무비플러스월~목 오후 1시 20분, 8시 30분80년대와 발을 걸치던 시절, 케이블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지상파와 미군방송에서 방송하던 상당수가 진짜 가족을 다루는, 가족애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였다. 지상파는 케이블 출범 후에도 비슷했다. <코스비 가족 만세>(The Cosby Show), <마가렛 조는 못말려>(All-American Girl), <패밀리 타이즈>(Family Ties), <풀 하우스>(Full House), <아빠 뭐하세요?>(Home Improvement) 등등. 그러나 케이블 출범 이후 양상이 달라졌다. <프렌드>(Friends), <내 사랑 캐롤라인>(Caroline in the City), <엘렌>(Ellen) 등 도시 독신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시트콤이 약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가족을 다루는 시트콤은 아이가 없고 개를 키우는 (독신과 다름없는) 젊은 부부 이야기 <못말리는 부부>(Mad about You)나 유사가족 형태를 다루는 만화영화 <베베의 아이들>(Bebe’s Kids),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다른 <요절복통 70쇼>(The 70’s show) 정도가 남거나 소개되자마자 도태되거나 고만고만한 인기를 얻는 선에 그쳤다. <못말리는 번디가족>(Married… with Children)이나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3rd Rock from the Sun), <말콤네 좀 말려줘>(Malcolm in the Middle) 등은 가족애를 다루기보다는 가족구성원을 다루는 ‘만화스러운 엽기쇼’ 비중이 상당히 높은 변형 가족 시트콤이다.

시추에이션 코메디의 기본 조건이 사소함을 과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못말리는 번디가족>이 이 극단성의 선구적이자 최적표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레이 로마노의 코미디 <내 사랑 레이몬드>(Everybody Loves Raymond)는 정말로 평범 그 자체를 무기로 밀고 나간다. 금쪽같은 아들딸과 토끼같은 마누라를 데리고, 알콩달콩사는 신혼 시절은 애저녁에 지나간 부부. 남편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나는 대로 살고 싶은데 세상사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바로 옆집에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은 매사에 끼어든다. 평범한 진퇴양난에 놓인 평범남의 고난사. <내 사랑 레이몬드>는 마치 우리나라 시트콤을 보는 것만 같다.

‘80년대 후반에서 케이블 이전’까지의 주요관계는 부부와 자녀, 그 이웃과 친척이다. 하지만 <내 사랑 레이몬드>는 마치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주인공 위의 세대, ‘여자의 시댁’이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한 맥락을 차지한다. <내 사랑 레이몬드>에서는 며느리를 딸의 입장으로 대한다. 일종의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하지만 남은 남이다. <내 사랑 레이몬드>가 지금까지 소개가 된 ‘유사가족 시트콤’ 혹은 ‘가족 시트콤’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사실성을 확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유사가족이라는 것이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실제 인생에서 일어나는 유사가족 형태를 시트콤의 핵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족이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워서 벌어지는 트러블은 우리나라 드라마와 시트콤에서 상당수 등장하는 소재이다. 시트콤은 아니지만 김수현의 <내 사랑 누굴까>가 그 극단적 예로, 3대의 남자들과 남자들의 여자들이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을 굵직한 사건의 기폭제로 삼는다. <내 사랑 레이몬드>가 바로 그런 유머를 발휘한다. 레이가 벌이는 말썽을 늘상 더 크게 만드는 것은 말썽 자체보다도 레이의 친족관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트러블이다.

다만 <내 사랑 누굴까>와 <내 사랑 레이몬드>의 차이점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과장을 많이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그리고 결과는? <내 사랑 레이몬드>가 훨씬 과장이 없다. 물론 시트콤스러운 과장은 있다. 하지만 상당히 수선스럽고 고집불통인 레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도 결국은 툭탁거리는 부모의 평범함에서 출발한다. 병적으로 질시의 시선을 동생 레이에게 날리는 로버트도 알고보면 과장스럽지가 않다. 추바카만한 키와 과묵함으로 레이를 압도하는 로버트는 때로 레이의 강박관념이 형상화된 허깨비로 보일 정도지만, 로버트의 망상에 가까울 자괴감은 독립못하는 캥거루족의 공포에서 단 두발짝 정도 앞으로 나아간 모습이다. 그래서 레이네 집안의 가족애는 언제나 싸움을 유보해서 얻는 현실적인 평화를 얻고 끝난다.

사고를 일으키지만 현실적인 선에서 수습가능한 사고뭉치 레이몬드의 모습은 웃기기 위해선 물불을 안 가리는 다른 시트콤과는 사뭇 다르다. ‘푸하하’ 웃는 것이 아니라 ‘맞아 그렇군~ 킥킥’ 하는 웃음이 지배한다. 어눌한 레이의 유머를 따라가다 보면 정말 제목 그대로 누구나 레이몬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바로 내 옆집 사람이니까. 내 옆집 사람이 죽일놈이 아닌 이상에야, 딱 남들만큼의 단점만 지닌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남명희/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