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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평이 돼선 안 되는데
2002-08-14

조선희의 이창

드디어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 말해놓고 보니 왠지 70년대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었던 홍수환 생각이 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 칼럼을 쓰기 시작하던 지난 3월, 나는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내고 수정작업 중이었다. 나는 씨네21 편집진에 그냥 전 씨네21 편집장으로 크레딧을 달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두달쯤 지난 어느날 씨네21을 받아보니 내 직함이 느닷없이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이라고 돼있었다. 나는 편집장에게 메일을 보내 소설가는 다시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유를 썼다.

- 가령 어떤 독자가 씨네21에 전화해온다고 하자. “저, 조선희씨의 대표작이 뭐지요? 제가 좀 사보고 싶어서요.” “대표작은 없는데요.” “그럼, 그냥 어떤 소설책을 내셨지요?” “소설책을 안냈는데요.” “그럼, 그게 무슨 소설가에요?” 이런다면 모골이 송연하지 않아? -

그런데 이번주부터 소설가 크레딧을 쓴다. 소설이 책으로 나왔으므로. 사실 지난해 7월, 다른 활동을 접고 틀어박혀서 소설에 관한 생각을 노트에 적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나는 이미 소설가였다. 누가 인정하든 말든 그야말로 존재론적으로 소설가였다. 매일매일, 온몸과 온 정신으로 소설가였다. 소설을 쓰면 그걸로 이미 소설가다. 그게 책으로 나오든, 원고더미로 창고에 처박히든, 잘 팔리든, 초판 찍고 잊혀지든, 소설 쓰는 사람의 존재론적 특성이 달라지진 않는다. 소설가라는 크레딧을 지워달라고 요청하던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 좀더 소설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조선희씨가 무슨 소설책을 냈지요?”라고 묻는 독자가 겁났던 건 내 자의식이자 결벽증일 뿐이다.

소설을 쓰던 지난 1년이, 내가 사회활동을 하면서 보낸 세월 가운데서 가장 밀도 있는 시간이었지 싶다. 노동의 강도로 보나, 자기 표현의 수위로 보나, 집필한 원고 분량으로 보나. 남의 작품에 대해 논평하는 옵저버의 역할이 무료해서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란 바깥에서 보기에 그랬던 것만큼 실로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하지만 소설 쓰는 일은, 모든 개인작업이 그럴텐데, 월드컵경기를 혼자 보는 것과 같았다. 가령 혼자 붉은 티셔츠 입고 거실에 앉아 ‘대한민국’ 어쩌구 해가면서 이탈리아전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경기를 관람하고 싶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훌륭하게도 예술의 진경을 산보하거나 지고한 이상을 향해 매진한다 해도, 삶에서 가장 유쾌한 순간은 결국 친구들하고 시시덕대면서 노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서 어떤 선배 소설가가 “소설은 엉덩이로 쓴다”는 명언을 남겼는지 모른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지긋이 누르는 게 내게도 가장 힘든 과제였다.

지금은 KBS 전국노래자랑이 그냥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는 여흥프로가 됐지만 예전엔 가수지망생들의 데뷔코스로 권위를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고 황문평 이백천 같은 심사위원들이 출연자들에 대해 “감정은 풍부한데 박자감각이 전혀 없군요” 따위의 엄정하고도 예리한 비평을 내놓아서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는 어느 연말특집에서 심사위원들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황문평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 우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야말로 음정, 박자 모두에서 심한 음치였던 것이다.(절대 황문평 선생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맨날 남의 작품 가지고 멋대로 떠들다가 내 스스로 창작을 시작했을 때 나는 ‘황문평이 돼선 안되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문학동네는 영화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다. 그건 제작편수만으로도 능히 짐작되는 일이다. 영화는 많아야 한 해 1백편 만들어지지만 소설은 그 백배쯤 된다. 문학은 어차피 원맨밴드 같은 것이라 저 하고 싶다면 아무도 안 말린다. 실패했을 경우라도 본인 한 사람의 인생만 망가지면 된다. 그렇다 해도 문학동네로 들어가는 신참자 입장에서 나도 일종의 검문검색과 신원조회와 필기시험 같은 도전에 응하면서 남모를 고초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분야를 바꿔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좀 엽기적인 비유를 하자면, 밤에 혼자 공동묘지 고개를 넘어 건너마을로 가는 것과 같다. 여하튼, 인생의 노선을 바꾸는 길에는 길동무도 없고 괴괴한 고독만이 함께할 뿐이다.

마르케스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소설 쓰는 이유는 “친구들한테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말한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어디 소설뿐이랴. 말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모두 어찌 생각하면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사랑을 받으려는 행위 아닐까.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