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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vs 조선희, <오아시스>를 말하다(2)
2002-08-09

˝소외된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 이야기˝

조선희

그러니까 상식을 뒤집고 싶은 의도가 있었고 그걸 위해서 캐릭터를 만든 거죠?

이창동

당연하죠. 공주 오빠 이름이 상식이에요. 한상식. 그리고 관객에게는 전혀 전달할 필요도 없는 건데, 나 혼자 이해하는, 영화를 만든 우리만이 이해하는 코드가 있어요. 설경구 이마에 보면 약간의 반점의 흔적이 있어요. 그거 화면에 잘 안 보이는 데도 세심하게 분장했어요.

조선희

그게 무슨 반란의 징표인가?

이창동

장수가 될 놈이 태어나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갖다버리죠. 동서를 막론하고 있는 설화잖아. 그게 사회화가 안 되는 인간이거든. 사회화가 안 되는 인간이 뭔가 징표가 있는 거예요. 그런 코드는 관객은 모르겠죠. 우리가 사회화라고 말하는 게 옛날에 장수를 내다버리는 거하고 똑같은 가치예요.

조선희

감독이 종두에게 특히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어떤 부분이에요?

이창동

종두는 경계에 있는 인간이거든요. 보통 사람과 또라이의 경계, 아주 바보 같기도 하고 굉장히 영악한 놈 같기도 하고. 어느 쪽으로도 규정짓기가 힘든 인간이죠. 설경구도 연기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줄 위에서 줄타기 한 것 같을 거야. 어떤 순간에는 너무 정상처럼 보이고, 어떤 순간에는 바보 같고, 미친놈 같고, 그 선을 한발만 넘으면 위태롭고. 그 캐릭터가 나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선희

얼마 전에 <오아시스>를 먼저 본 사람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었냐면, 1시간 반 동안 문소리가 계속 몸 뒤트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문이라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기가 고통스러운 게 문소리가 몸 뒤틀고 있는 것보다도 영화에서 주인공 나름대로 순진무구한, 러브스토리를 꾸며가는 이들을 두고 주변에는 박해하는 인간들뿐이잖아요. 부모, 가족, 경찰, 심지어 목사까지 가담해서 거드는데, 우리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주류의 입장인 거라. 우리도 전과자를 대할 때 비슷했을 거예요. 주인공 둘이 한없이 몰리는 상황도 보기 힘든데다가, 우리가 그 가해자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게 굉장히 괴로운 것 같아요.

이창동

그 사람들이 특별히 사악하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했어요. 아주 교양있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사회화된 상식의 평균치라고 생각했죠. 그들 나름대로는 종두나 공주를 걱정하고 생각해요.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묻는 거니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이거 말이 되나. 그러니까 멜로영화가 가지고 있는 온갖

방법론을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음악도 없어야 하고.”

이창동

주제 - 소외된 인간의 사랑을 찾아서

조선희

우리는 상업영화 패러다임에 길들여져서 중간부터 자꾸 조바심이 났어요. 저 주인공들을 구원해야 하는데, 수렁에서 건져야 하는데. 어쩌려고 그러지? 나중에 공주가 주장을 하나? 그게 받아들여지나? 근데 아무리 시간을 끌면서 봐도 그런 식의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누명도 안 벗기고, 수렁에 빠뜨린 채로 끝내는 거야. 근데 그게 현실에 가깝거든요. 극단의 아웃사이더, 극단의 약자가 오해를 벗고 누명을 풀 힘이 없거든, 현실에서는. 현실적인 결말을 선택한 거야. 감히 영화판에서 어떻게 저렇게 끝을 낼 수 있지, 겁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창동

그보다는 나는 사랑이라는 것의 상징이랄까, 그런 걸 더 생각했어요. 소외된 인간들의 사랑이라고 해서 별난 사랑으로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니고, 오히려 감히 욕심을 부리자면 누구다 다 해보는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사랑을 그리려고 했던 거죠. 사랑이 가장 본질에 가까워지면, 가장 흉하고 추한 자들의 사랑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들의 만남이 아닐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르지만. 사랑의 본질로 보면 남자 입장에서는 파괴하려고 와요. 욕정을 가지고 온다고. 생물학적 법칙이죠. 강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죠. 너무 갔나? 그리고 그것이 다른 어떤 걸로 승화되죠. 같이 판타지를 꿈꾸지. 사랑이라는 판타지는 정말 필요한 거잖아. 그건 조물주가 인간뿐 아니라, 모든 개체에게 놓아주는 마취제거든요. 생명력을 위해서. 생명력의 기초지. 그렇게 소중한 건데 워낙 흔하다보니, 워낙 세속화되고, 복제가 횡행하다보니 그 판타지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훼손되거나 퇴색한 그런 판타지가, 사랑이 가장 크죠. 그런 점에서 사랑의 본질까지도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조선희

그건 느낌이 오네. 가장 외로운 자들이 할 수 있는 사랑.

이창동

우리가 사랑을 느낄 때, 감격하는 이유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그런 거 아닙니까.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 판타지니까 주관적이죠. 하지만 주변의 객관은 차갑죠.

조선희

사련이라는 말 있잖아요. 죽을 사자를 쓴 사련. 완전히 버려진 두 사람의 사랑, 아니면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해서 모든 걸 다 버려야 하고, 파문을 당하면서도 감당하는 사랑.

이창동

그것도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죠. 유부남, 유부녀의 사랑. 불륜이잖아요. 그것도 사회적 가치의 판단이거든. 근데 그건 너무 특수화돼 있으니까. 오히려 본질에 가깝기는 종두와 공주 같은 인물일 거라고 생각해요. 설명할 길도 없고, 사랑의 특성인 판타지를 실현하는 방법도 없고. 그 방법도 사회적으로 다 마련돼 있어요. 결혼, 내집 마련, 육아, 태교 등등. 그게 제도와 문명이 마련해 놓은 거지만, 과연 그게 사랑의 실현이냐. 정말 사랑을 실현하는 건 뭐지. 그건 종두처럼 나무를 자르는 것이 아닐까.

관객 - 이야기꾼의 고민, 감독의 고뇌

조선희

둘이 사랑도 완성하고 주변과도 화해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관객도 바라는 바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 그 감독 참 지독하다는 생각 들어요.

이창동

관객이 단순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화해시켜봐요. 바로 욕해요. 그럴 줄 알았어라고. 관객은 그렇게 영악해요. 영악하기보다 잔인해요. 화해도 하고 오해도 풀길 원하지.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 마무리짓는 순간 실망해요. 왜냐하면, 가짠줄 아니까.

조선희

그래요. 이중적이죠. 한편으로는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안 가면 불편해 하는 거야.

이창동

그게 이야기꾼의 고민이죠. 그렇지만 자기 노선을 분명히 선택해야 해요. 관객이 원하는 걸 줄래? 아니면 관객이 원하지는 않지만 어느 지점에서 만날래? 이거죠. 내가 하는 대로 관객을 일방적으로 끌고올 수도 없고. 그래서 섹스행위와 비슷하다고 보는데, 내가 창녀가 될 수도 있어요.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요. 강제로 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러지 않고 서로가 좋아서 만나서, 어떤 순간에 접점이 있다고 믿죠. 그런 믿음이 없으면 갑갑하지. 절망이지. 이런 고민은 나한테는 적어도 수십년된 거거든요. 글을 끼적이든, 영화를 하든.

캐릭터 - 평균 이상은 없다, 평균 이하도 없다

조선희

주인공 빼고, 나머지가 다 나쁘게 그려져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주인공들이 벼랑 끝에서 사랑하는 거니까 우화적인 단순화나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이창동

나는 과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인물이 다 평균적이지 않은가. 주변인물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죠.

조선희

가령 <델마와 루이스> 봐도 주인공들이 벼랑에 몰려도 경찰 중에서 하비 카이틀처럼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을 하나 박아놓음으로써 관객과 다리를 놓잖아요.

“처음에 이 영화 찍는다고 들었을 땐 전과자가 뇌성마비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라는데 좀

억지스럽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보면서 그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 것 같아요. 감옥에서 2년 반 동안

남성호르몬을 억제당한 사람이, 대단한 도덕의식 같은 것도 없는 젊은 남자가 빈집에 버려진 뇌성마비 여자를 봤을 때 아랫도리가

설 것 아녜요.”

조선희

이창동

우리 그런 거 안 좋아하지. 주변 인물에게는 선악은 없어요. 상식은 있지. 우리의 상식, 우리의 관습, 시스템, 사회화 이런 거는 있죠. 주변 사람들이 왜 저러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상식이 왜 저러냐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조선희

대개의 감독들은 자기 속은 시궁창이라도 영화는 뽀시시하게 만들잖아요.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반대예요. 내가 서른다섯살 이하라면 이창동 감독은 사람이 좀 문제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나이가 들다보니까 그 결벽주의를 이해하게 돼요. 우리 안에 다 똥개가 한 마리 들어 있는 거야.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달콤한 냄새만 나면 쫓아가서 핥아먹는 거야. 그러나 사람들이 그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 똥개가 들어 있어 그러면 신경질내고 짜증을 내지.

이창동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속에 있는 똥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불편한 게 아니고, 똥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판타지가 있잖아요. 그걸 깨니까 불편해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영화를 보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게 영화라는 판타지가 아니어서 불편할 거예요.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특별히 과장돼 있거나, 특별히 더 부정적으로 그리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뭔가가 빠져 있어서, 그게 현실처럼 느껴지니까 싫은 것 같애요. 내 생각에는 똥개라도 조금 영화처럼만 그려놓으면 웃으면서 보잖아요. 그래 맞아, 나도 똥개야. 그런데 영화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불편한 것 같아요. 나는 이 영화 찍으면서 화두가 사랑이라고 했죠. 사랑과 판타지라고 했죠. 그 등가에 놓을 수 있는 게 영화라고 생각해요. 영화도 판타지죠. 영화를 볼 때 기대하는 마취상태가 있어요. 그걸 안 주니까 불편해지죠. 나는 이번에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놓고도, 관객하고 끊임없이 너무 판타지 속으로 밀어내지도 끌어들이지도 않고 그 선에서 계속 부딪치고 싶었어요. 영화라는 판타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오아시스> 찍는 동안 나한테는 사랑과 영화가 똑같은 것이었어요. 이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까가 곧 이걸 영화적으로 어떻게 보여줄까의 문제였으니까. 관습화된 건 무수히 많아요. 관습화된 사랑 이야기, 관습화된 영화문법 무수히 많거든요. 그것과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했거든요. 그게 틀림없이 관객을 불편하게 하죠. 그렇지만 그게 내 의도였기 때문에, 그 불편함의 끝까지 가서 결국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냐 없냐는 문제였단 말이죠. <오아시스> 중간에 종두가 영화 레커차 따라가는 장면은 내가 오버한 거죠. 내가 의도를 일부러 지나치게 심은 거죠. 오토바이 타고 촬영차 따라갈 때 촬영차는 굉장히 판타스틱하게 보이도록 찍었거든요. 영화라는 판타지가 관객에게 어떤 건지 나도 잘 알죠. 멜로라고 레테르가 붙어 있는 이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이 어떤 판타지를 기대하고 오는지도 알죠. 나는 그 판타지가 뭔가, 그것까지도 질문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은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죠. 원하는 대로만 해줄 수만은 없죠.

조선희

처음에 영화의 컨셉을 듣고 여러 가지 걱정을 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설득이 됐어요. 통한 거죠. 감독이 뭔가 믿는 바가 있으니까 밀어붙였겠죠. 그래도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판타지 대목들 있잖아요. 문소리가 멀쩡해져서 연애하는 상상 속의 장면이나 하얀 새, 코끼리 같은 건 관객에 대한 나름의 배려 아닌가. 주인공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끝까지 몰고가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진통제를 줘가면서 고문하는 거다, 그런 배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데.

이창동

아니에요. 그렇다면 판타지를 더 아름답게 찍겠지. 공주가 판타지에서 정상인이 됐을 때 더 어색하게 보이잖아요. 그 적당한 어색함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자연스럽고 예쁘면 아무리 판타지지만 어색하지 않을까? 또 현실적으로 판타지가 충분히 초라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코끼리 나온다고 해서 코끼리가 뭐 대단한 거 하는 거 아니잖아요. 인도 여자도 별 볼일 없잖아요. 그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 그 긴장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나한테는. 관객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고. 판타스틱하게 만들려면야 무슨 짓이든 못하겠어요. 판타지가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지나치게 현실과 거리가 멀거나 하면 내가 이야기하려는 판타지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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