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CF가 참해졌다. 신용카드를 사용해 한번 폼나게 살아보자고 솔깃하게 제안해온 카드 광고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바른생활 교과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신용카드 업계의 총성없는 전쟁이 후끈 달아오른 올초만 해도 카드 광고는 앞다투어 풍요롭고 멋진 삶의 전형을 제시하느라 바빴다. LG카드 광고의 이영애와 배용준은 못하는 레포츠가 없는 만능남녀를 대변하며 ‘최고는 늘 앞서가며, 그래서 난 LG카드만 쓴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국민카드 광고의 ‘코리안특급’ 박찬호는 고가의 외산승용차, 웨딩드레스를 입은 일군의 신부들을 배경으로 일등 신랑감의 위풍당당함을 뽐냈다.
그런데 최근 이들이 한입 갖고 두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신용카드를 결제하는 ‘멋진 녀석’의 모습을 통해 ‘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란 노골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말을 건네온 삼성카드 CF만 갈수록 강도를 높여가며 가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그 능력있는 남성(정우성)은 얼마 전 승진한 부인을 위해 근사한 야외카페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더니 현재는 타이태닉 같은 거대한 배를 타고 우아한 여행을 즐겨 부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정우성이 신용카드 명세서에 사인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간 그의 얼굴 주변에 푸른 액자가 나타나며 ‘♬삼성카드’란 징글(Jingle: 광고에 사용되는 짧은 음악)이 나오면 사실 약간 심란해지기도 한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준 히딩크 감독 얼굴이 교차되면서 ‘그 (승리를 만드는) 능력’과 ‘이(소비하는) 능력’ 사이의 괴리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삼성카드 광고처럼 한눈팔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세는 LG카드 CF나 국민카드 CF처럼 분위기를 파악하는 쪽인 것 같다.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신용카드 사용의 폐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고려하는 것 말이다.
카드업계에 건전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카드업계의 후발주자인 우리카드가 ‘마음으로 쓰는 카드’란 슬로건 아래 ‘우리’를 위한 카드사용법을 전파한 게 시발이었다. 우리카드 CF에서 신혼부부로 설정된 이병헌과 김희선은 ‘우리 아버님, 우리 어머님, 우리 도련님, 우리 처제’ 등을 다소곳하게 외치며 가족을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에 뿌듯함을 표하고 있다. 이기적인 소비를 조장하는 기존 카드 CF와 달리 긍정적이고 착한 이미지로 차별화를 모색한 이같은 전략은 브레이크 없이 화려한 판타지를 향해 달려가던 카드 CF의 도도한 물줄기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LG카드 광고는 변신의 폭이 워낙 넓어 처음엔 당혹스러운 기분마저 안겼다. 카드 사용을 통해 늘 최고로 살아간다던 이 CF의 화자(이영애와 배용준)가 물건을 구매하러 상점에 들렀다가 ‘갖고 싶지만 꼭 필요한지, 욕심나지만 갚을 순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해야죠. 신용카드 바르게 씁시다’라며 의젓한 자제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광고의 분위기에 맞게 튀지 않는 단정한 차림새로 깍듯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두 모델의 모습은 영락없는 공익광고 캠페인의 모범시민형이다. 국민카드 CF 역시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마무리용으로 물린 뒤 무명 여성모델을 기용해 이미지 변주에 나서고 있다. 이 광고엔 사회 초년생인 듯한 젊은 여성이 갓 발급받은 카드 뒷면에 이름을 적으며 ‘난생처음 신용카드를 발급받았습니다. 꼭 필요할 때 쓰겠다고 마음속에 한번 더 서명했습니다’란 내레이션을 들려주며 ‘국민카드가 성실한 사람들의 카드’라는 공식을 전달하고 있다.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우리카드 대행사 코래드 제작사 까치 앤 까치(김영배 감독)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LG카드 대행사 LG애드
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국민카드 대행사 유로넥스트
변신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만화 주인공 같은 이들의 모습은 시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광고의 숙명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시적인 이미지 제고용으로 위선적인 자세 낮추기를 실시했다고 단순히 생각하면 곤란하다. 카드 광고의 흐름을 주도해온 LG카드 광고는 ‘건전한 카드사용, 건전한 신용카드’란 국가 공식 캠페인을 선생님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매우 유순한 태도로 적극 수용함으로써 ‘넘버1’ 이미지를 쌓는 파생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는 각종 이동통신 브랜드가 혈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SK텔레콤 광고가 ‘잠시 휴대폰을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역발상 메시지로 여유를 부리며 업계의 맏형 같은 이미지를 얻은 것과 비교할 만하다. 국민카드 광고 역시 박찬호의 성적 부진이란 예상치 못한 악재로 애를 태우는 과정에서 쉬어가는 페이지 같은 분위기 전환용으로 ‘무명모델과 풋풋한 이미지’란 전략적 변신을 이룬 듯 보인다.
어쨌든 상업광고가 본성을 감춘 채 공익성을 표방한 모습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재정비하는 데 의도한 만큼 효과를 거둘지, 또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을 억제하겠다는 사회적인 대의명분에도 과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앞으로 카드 광고는 현재와 같은 건전표만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변신 방망이를 가동해 제2의 환골탈태에 나설 터이다. 다음엔 과연 어떤 모양새로 소비자를 찾아갈지 궁금해진다.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