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횡설수설
2002-08-07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한산하다. 김단과 김건은 할머니에게 가고 아내는 고창에 춤 전수를 갔다. 그들과 일주일째 연락을 끊고 있다. 가족이라는 관리 체제를 잠시 떠나보는 건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유익한 일이다. 휴가철의 한산함이 끝날 무렵, 두해를 끌어온 <서준식 옥중서한>이 나온다. 832페이지 양장본. 이놈들아 이게 책이다 하는 마음으로 낸다. 객기일까. 그러나 때론 객기가 고전을 사수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나에게서 지사를 자처하는 자의 슬픔을 느낀다는 후배가 권한 <이방인>이 어제 도착했다. 새벽에 깨어 머리맡에 놓아둔 <이방인>을 집었다. 흰 바탕에 주황과 검정을 사용한 표지에 코트 깃을 올리고 담배를 문 카뮈가 있다. 책의 절반이 해설이다. 세계명작답군. 중학시절 생긴 세계명작에 대한 반감(이 기분 나쁜 권위와 알아먹을 수 없는 번역을 용서하느니, <>이나 <감자>를 한번 더 읽겠다는 열세살 소년의)이 새삼스레 치밀어오른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첫 세계명작 읽기를 시작한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걸 보면 조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 다름이 없는 상태다.” 문장을 지휘하는 날카로운 통찰에 알싸한 쾌감을 느끼며 나는 문득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떠올린다. 4년 전 제목의 풍자적 느낌이 좋아 집어든 <옛 거장들>로 나는 그를 만났고, 그 끝없이 반복되는 경멸의 정신에 흔쾌히 압도되었다. “오늘날에는 더이상 선생들이 귀를 잡아당기지 않는다. 그리고 더이상 개암나무 가지로 손가락을 때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파괴 성향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 박물관에서 소위 거장들 옆을 지나가는 선생들을 보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내가 만난 선생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삶을 파괴하고 망친 그들과 똑같다. 선생들은 이것은 이래야만 한다, 저것은 저래야만 한다고 말하며, 그 어떤 항변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가톨릭 국가가 조그마한 반대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들은 그 무엇도, 자신의 어떤 것도 학생들에게 채워주려 하지 않는다. 마치 거위에게 옥수수를 먹이듯 학생들에게는 국가의 오물만을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 국가 오물은 학생의 머리가 숨막혀 죽는 그때까지 채워진다. 국가는 생각한다. 아이는 국가의 아이이다. 그리고 그에 맞게 다루고, 수백년 전부터 파괴적인 행위를 해온 이 국가가 아이를 낳았다, 단지 국가의 아이만이 태어났다. 이게 사실이다.” 국가는 자본의 장치일 뿐이며 제도교육이란 단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선전도구라는 좌파적 분석과 다름없는 결론을, 무정부주의적 탐미주의자는 단지 경멸만으로 성취한다. 기지촌 클래식 애호가들의 성지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중세의 감옥과 같다. 오스트리아와 불화하고 또 불화하던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희곡이 오스트리아에서 공연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모든 정직한 정신의 운명처럼, 그가 남긴 경멸은 경멸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베른하르트 대륙(베른하르트를 번역하는 자신들의 국제주의적 자부를 이르는 말)은 베른하르트를 실천하지 않고 베른하르트의 기억을 실천한다. 모든 베른하르트들의 운명이 그렇고 한국의 베른하르트들의 운명도 그렇다. 김수영을 추억하는 이들은 죽은 동료의 시를 거론하며 너는 왜 이런 쓰레기만을 남겼냐고 말하지 않고, 하길종을 찬미하는 이들은 선배들의 영화를 거론하며 한심한 활동사진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과 불화하지 않기 위해 김수영과 하길종을 들먹이며, 김수영과 하길종을 닮지 않기 위해 김수영과 하길종을 들먹인다. 그들은 아무것도 분명히 판단하지 않기 위해 인간과 세계의 세부를 늘어놓고 또 늘어놓는다. 나는 경멸의 정신을 기다린다. 인간과 세상의 세부를 생략하지 않으면서도 정점에 이르는 경멸의 정신에 지사를 자처하는 자의 슬픔이 위로받길 기다린다.김규항/ 출판인 gyuhang@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