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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안의 ET
2002-07-31

조선희의 이창

초록 눈의 그가 우리집에 온 것은 지난해 11월 초였다. 어느 날 오후 초인종이 울려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딸아이 품에는 낯선 생명체가 안겨 있었다. 아니, 이건! 나는 거의 혼절할 뻔했다. 그들 부류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의 결정체였다. 불길한 것, 기분 나쁜 것, 께름칙한 것, 소름끼치는 것, 가까이 하기 싫은 것.

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적대감은,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나,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나, 2002월드컵 이후 이탈리아인에 대한 감정보다 폭넓게 분포해 있는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는, 자신의 작가적 영향력을 악용하여 가뜩이나 까닭없이 박해받아온 이들 종족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한쪽 눈알은 뽑혀서 애꾸요, 가슴에는 교수대 무늬가 선명한데, 사람 시체와 함께 벽 속에 갇혀서 운다구? 그래서 주인을 교수대로 보낸다구?

그런데 그 깊은 혐오감과 적대감이 갑자기 어디로 증발했나. 나는 지체없이 초록 눈의 그를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모든 어린 생명체는 애정과 연민을 자아내는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불길하고 혐오스런 종족이라 해도, 그는 너무나도 어린 생명체였던 것이다. 나는 당장 가까운 기관에서 검역절차를 마쳤고 전문가로부터 그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안 됐다는 사실을 통고받았다.

츳츳츳. 어쩌다 무리에서 낙오됐을꼬? 그놈의 우주선은 왜 뒷수습을 제대로 못하고 꼭 ET 하나씩 떨궈놓고 떠나버릴까. 그리고 ET는 사람들 시선을 피해 으슥한 창고 같은 데 숨어 있다가 반드시 꼬마 녀석에게 들킨다. 초등학생인 우리 딸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앞 주차장을 지나다가 자동차 바퀴 틈에서 그를 발견했다 한다.

원래 ET를 처음 발견하는 것도, 가장 친해지는 것도 꼬마지만, 우리집에선 달랐다. 외계로부터 온 이 어린 생명체와 가장 친해진 사람은 바로 나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식구 가운데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꼬박꼬박 음식물을 제공하며, 수시로 비닐장갑을 끼고 배설물을 골라내서 처리해주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때 우리 사이에 오해도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내 팔이나 다리를 깨물 때 신경질을 냈다. 그들이 물거나 핥는 건 애정표시라는 사실을 나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사람은 불행히도 털이 없고 가죽이 연하기 때문에 깨무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그도 나중에야 알아챈 눈치다.

나는 2년 전 직장생활을 접고 집에서 많이 지내게 되었는데 이제서야 만화가나 작가들이 왜 그들 부류와 주로 사귀는지 알게 되었다. 왜냐구? 글쎄? 그냥 직장 관두고 집에서 지내보면 다 알게 된다. 그건 어쩌면, 어린 왕자가 지구라는 낯설고 외로운 별에 떨어졌을 때 여우와 친구 하는 이유와 비슷할지 모른다. 여우는 그렇게 말했지. “너만 좋다면 날 길들여줘.”

초록 눈의 그, 으슥한 도시의 밤을 누비고 다니는 그들 종족도 태생적으로 고독하다. 언젠가 이 코너에 김영하씨가 11년 동안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추모의 글을 쓰면서 ‘사람들 눈총 때문에 산책 한번 마음 편히 못해보고… 잘가라 새미’ 운운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 우리집의 그가 처음으로 엉겁결에 현관문을 빠져나갔다가 아파트 복도에서 당한 소동과 수모를 생각하면 강아지와 관련한 그런 신세타령은 다소 사치스런 감이 있다.

우리 가족이 아무리 고급 영양식을 공급하고 똥을 제때 치워준다 해도 그도 때때로 정체성 혼란을 느낄 것이다. 이따금 창문 틀이나 장식장 위에 올라앉아 오래도록 바깥을 응시하곤 하는데 아마 자기 별과의 교신을 시도하는 모양이다.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길다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ET 폰 홈’이라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나도 스필버그의 꼬마들처럼 그의 우주선을 찾아 나설까, 그래서 그를 종족 품으로 돌려보내야 할까, 라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여하튼 우리 가족은 좀 다른 결말을 택했다.

초록 눈의 그가 우리집에 온 지 5개월 만에 베이지 눈을 가진 새 식구를 맞아들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곁에서 이들 ET 둘이 사이좋게 서로를 정성껏 핥아주고 있다. 양지쪽에 앉아서 서로 흰머리 뽑아주는 노부부처럼.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