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 사랑하는 내 마누라, 내 자신감의 원천
<블러드 심플> <아리조나 유괴사건> <밀러스 크로싱>으로 스타일을 인정받은 배리 소넨필드는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영화의 촬영감독을 거쳐 <아담스 패밀리>로 유망주 감독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1996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의한 <맨 인 블랙>을 위트와 개성까지 겸비한 희귀한 여름 액션영화로 만들어내면서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찾는 ‘A급 감독 클럽’에 가입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사다리를 무사히 타고 오르는 데 성공한 배리 소넨필드가 난생처음 삶의 자신감을 얻은 순간은 뭇 사람의 짐작과 달리 <맨 인 블랙>이 2억5천만달러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우며 <쥬라기 공원2>를 추월한 1997년 여름이 아니라 아내 수잔이 프로포즈를 받은 1989년의 어느 날이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가 나와 결혼해주기로 했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괜찮은 면이 내게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소넨필드는 회상한다. 평소 ‘스위티’라고 부르는 아내에 대한 소넨필드의 신뢰와 애정은 어머니와 아들의 유대를 연상시킨다. 소넨필드가의 침실 풍경 하나. 벽장문이 열려 있으면 잠을 못 이룰 만큼 여전히 겁이 많은 소넨필드는 바람 소리나 난방 시스템 소음에 잠이 깰 때면, 아내를 깨워 아래층에 내려보낸 다음 담요를 뒤집어쓰고 아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고 한다. 이러한 소넨필드 내외의 일상은 <겟쇼티>의 한 장면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맨 인 블랙>의 캐스팅에 결정적 입김을 끼친 것도 수잔 소넨필드.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각자 시나리오를 읽은 배리 소넨필드와 수잔 소넨필드는 동시에 겉장을 덮으며 각각 “토미 리 존스!”와 “윌 스미스!”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쯤 되면 <아담스 패밀리>의 고메즈와 모티샤가 자랑하는 닭살스런 부부애도, 예의범절과 옷차림의 코드가 뒤집혀 있을 뿐 결국 핵가족 찬가인 <아담스 패밀리>의 기묘한 온건함- 외양이 비슷한 팀 버튼 영화와 대조되는-도 설명이 된다. <아담스 패밀리2>에서 잠시 방황하던 삼촌 페스터가 돌아와 가족과 재결합하는 장면은 어느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피날레 못지않게 간지럽다.
제 6 장 - 나,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뉴욕 출신의 심약한 감독은 살벌한 톱니바퀴가 즐비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조 컨베이어 벨트를 어떻게 통과하는가? 지금 와서는 믿기 힘들지만 <맨 인 블랙>은 두명의 백인스타를 위한 시나리오였고 소니픽처스가 고집했던 J요원 후보는 크리스 오도넬이었다. 내심 윌 스미스를 점찍었던 소넨필드는 그러나, 예술가의 권리를 옹호하며 제작자들과 의협심에 찬 전투를 벌이는 대신 배우들에게 자기의 무능함을 내세우는 작전을 택했다. 크리스 오도넬을 만난 자리에서 J요원 역이 약하지 않은가라는 오도넬의 의구심에 맞장구를 치며 “시나리오가 별로죠? 그런데 나도 그 시나리오를 더 낫게 만들 자신은 없어요”라고 고백했고, 오도넬 다음으로 물망에 오른 시트콤 <프렌즈>의 세 남자가 찾아오자 차에 태워 한가하게 드라이브만 하다가 돌려보냈다. 스튜디오가 지쳐갈 무렵 소넨필드는 윌 스미스를 제작을 지휘한 스필버그의 집으로 보냈다. 스필버그가의 자녀들이 윌 스미스에게 홀딱 반해 아빠를 졸라댈 거라는 확신은 며칠 뒤 현실이 됐다. 그렇다해도 갈 데 없는 스트레스를 배리 소넨필드는 어떻게 극복할까? 정답은 “극복하지 않는다”이다. 소넨필드는 자신의 약함을 이용한다. <아담스 패밀리> 촬영현장에서 혼절한 적도 있는 배리 소넨필드는 심장이 약하다. 적어도 심장이 약하다고 스스로 늘 믿는다. 1편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바윗덩어리 같은 부담을 안았던 <맨 인 블랙2> 촬영이 2주째에 접어든 어느 날 배리 소넨필드는 자정을 넘겨 점심을 먹은 다음 온몸이 마비되며 쓰러졌다. 벨뷰의 정신병원으로 데려가 달라 소리를 질러 실려가면서 소넨필드는 이것이야말로 ‘윈-윈 상황’이라고 내심 좋아했다고 한다. 심장마비가 아니면 더 살 수 있을 테니 좋고, 죽게 되면 이 영화를 안 찍어도 되니까 잘됐다고. 소넨필드의 낙관은 옳았다. 마비소동 이후 회의에서 제작자들은 소넨필드에게 한결 친절해졌고 퇴짜놓았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난 신경증이나 고통을 의연하게 숨기려 하지 않고 그냥 드러내요. 나의 비밀 무기죠.”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은 여러 가지다. 10년에 조금 모자란 촬영감독 생활과 10년이 조금 넘는 감독 경력을 통해 배리 소넨필드는 불안과 번민, 노이로제 등의 연약함을 통해 벼려지는 강인함을 신봉하게 됐다. 생존 전략치고는 너무 부실하지 않느냐고? 최근 배리 소넨필드는 5중 충돌 착륙 사고를 낸 비행기에 타고도 멀쩡히 살아났다. 이 정도로 억센 운이라면 한번 해볼 만한 게임 아니겠는가?정리 김혜리 vermeer@hani.co.kr
배리 소넨필드 인터뷰
˝코미디의 조홧속은 내게도 무궁무진˝
촬영한 영화보다 감독한 영화로 기억되고 싶은가.
→ 촬영과 연출 두 가지 작업에 대해 동등한 자부심을, 다른 방식으로 품고 있다. 촬영감독일 때에는 훨씬 적은 압력과 내 일에 대해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전적 보상이 나은 쪽은 감독이다.
영화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 “초록색으로 할까요? 빨간 걸로 할까요?” 같은 스탭들의 질문 수백개에 대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들의 총합으로 영화의 특정한 톤과 스타일을 정하고 각각의 요소가 완벽하게 톤과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조정하는 일이다. 내게 감독이라는 직업은 열정도 아니고 나라는 인간의 됨됨이와 관계가 없다. 감독을 장래희망 삼아 성장하지도 않았다. 나는 우연히 감독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배관공과 같다.
아카데미상이 코미디 장르에 부정적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보나.
→ 문제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그해 최고의 영화나 가장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영화를 뽑는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편집에 대하여.
→ 커팅은 코미디의 적이다. 코미디는 <His Girl Friday>나 <Bringing Up Baby>가 그렇듯 액션과 리액션이 한숏 안에서 이루어질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 그러나 요즘에는 무엇을 찍든 마이클 베이처럼 MTV 스타일로 찍어야 하는 분위기다.
전편의 성공으로 <맨 인 블랙2>의 흥행에 대한 부담이 컸을 텐데.
→ <맨 인 블랙>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번 탓에 <맨 인 블랙2>는 지금까지 내 영화 중 가장 힘든 영화가 됐다. 각본도 골칫거리였고 프로듀서들과의 의견충돌도 힘들었다. <터미네이터> <오스틴 파워즈>의 경우처럼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속편들을 돌아보면 대부분 1편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영화였다.
코미디영화의 연출이 그렇게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 코미디는 어렵다. 만약 촬영하는 내내 스탭들이 웃고 배우들이 즐거워하면 그 코미디는 걱정을 해야 한다. 찍을 때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여겼던 장면이 결국 극장에서 가장 큰 폭소를 끌어내는가 하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촬영 분량이 다 찍고보면 전체 영화에 들어맞지 않아 편집실에서 잘려나가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코미디의 조홧속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
* 이상의 인터뷰는 1998년 1월26일치 <뉴스위크>, 2002년 3월29일치
<뉴욕타임스>, 2002년 7월9일 방송된 <프레시 에어>의 인터뷰와 2002년 7월14일치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 기사의
인용을 종합·정리한 것입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