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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 날자, 다시 한번 날아보자꾸나!
2001-03-28

한국영화회고록 - 심우섭 편 4 홍성기 감독, <열애>의 부진을 씻고 <애인>으로 재기하다

잠시 <여성일기> 상영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금은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수도극장에서 초여름 휴일을 기해 상영된 이 작품은 특히 여성관객의 마음을 대거 사로잡았다고 한다. 연일 입추의 여지없이 채워진

극장 안에는 특이하게도 두대의 영사기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그림이, 다른 한쪽에서는 소리가 흘러 나오는 중이었다. 원래

편집을 하면서 필름에 사운드를 입혀야 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러한 광학적 기술이 불가능했기에 후시녹음한 내용을 그림에 맞춰 동시에 틀었던

것이다. 현상작업 역시 국내에서는 마땅한 장비가 없었으므로 미국의 코닥사에서 해 가지고 온 차였다.

요즘은 영화가 진행되다 5분만 끊겨도 환불소동이 벌어지지만, 극장마다 영사기가 귀하던 그땐, 롤을 교체하기 위해 10분 상영하고 20분

쉬는 것이 다반사였고, 관객은 당연하다는 듯 담소를 즐기며 기다려 주었다고 한다. 전쟁의 발발에 따른 기존 필름의 유실은 가뜩이나 귀한

필름의 희소가치를 더더욱 치켜올렸고, 남은 필름들은 군관련 영화제작에나 간신히 댈 따름이였다. 이때문에 뉴스용 필름으로 제작한 기록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진해 주둔 미 제502부대에서 제작한 <리버티 뉴스>, 국방부 정훈국의 <국방뉴스>, 공군 정훈감실의 <공군영화> 등이

해당한다.

홍성기는 이 시기 함께 활동하며 인연을 맺은 김일해, 전택이, 노경희

등의 배우들과 함께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인 <출격명령>(1954)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이 역시 공군의 지원으로 제작된 군 홍보영화였음에도

불구, 삼각관계에 얽힌 사랑얘기를 극의 줄거리에 대입시켜, 홍성기만의 멜로영화 분위기를 흠씬 풍긴다. 라디오 방송작가였던 김영수가 시나리오를

썼으며, 당시 기술로는 촬영이 불가능한 공중신을 담기 위해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출격 비행기에 올랐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는 뒷얘기를

남겼다.

일제 시대에는 명치좌(明治座)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국제극장으로 바뀐 시공관(市公館)에서, 9월의 기분좋은 가을바람을 맞으며 간판이 올랐다.

35미리 흑백필름으로 촬영된 <출격명령>과 달리 대부분의 보도영화와 기록영화, 극영화는 16미리로 찍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외국영화의

범람으로 기세가 한풀 꺾인 한국영화 제작자들에겐 비싸고 구하기 힘든 35미리 필름보다는 값싸고 부담없는 16미리가 더 매력적이었다. 필름은

공보처를 비롯한 각 군본부에서 적극 지원되었다. 카메라는 미제 아이모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애리’(Arriflex)가 쓰이기도 했다.

<출격명령>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홍성기는 본격적인 멜로영화를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 구상에 골몰했다. 천형을 당한 남자에 대한 여인의 진실된 간호와 사랑은 사실 홍성기 자신의 삶으로부터 출발한 소재였다. 어린

시절 친어머니의 부재와 그를 대신한 누이들의 따뜻한 보살핌은, 홍성기의 영화에 끊임없이 모성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문둥이 역할의 남자

주인공에는 이집길이, 문둥이 아들을 둔 목사 역에는 왕년의 대스타 이금용이 캐스팅되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배우진이 아닐 수 없었다. <출격명령>의

멤버들이 고스란히 모여 만든 <열애>(1955)는, 1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제작비와 화려한 스타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어이없이 실패하고 만다. <열애>가 걸리기 바로 전 간판을 내린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 12만명이라는 의례없는 공전의 히트를 친

다음이었다.

이금용은 이 영화를 끝으로 숨을 거두고, 그를 기리기 위해 최초의 영화인장이 마련됐다. <열애>의 부진으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자기 터진 ‘국제 커뮤니티’(공산당)사건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홍성기는 감방신세를 지게 된다. 부산일보사에 근무하던 홍성기의

작은 매형뻘 되는 심상중씨가 직접적으로 연루된 상황에서 연좌제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다이빙

선수 세미 리의 신원보증으로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홍성기의 내성적인 성격에 상처를 입히고, 훗날 자신의 작품에서 이념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배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힘든 시기를 거친 홍성기에게 재기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춘광이 운영하던 신신영화사에서 2천만원(당시 돈 5천만환)의 제작비를 지원하며

영화 <애인>(1956)의 연출을 부탁했다. 당대의 여배우 주증녀를 앞세우고, 100여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영화음악을 제작케

하는 등 초반부터 타 영화사와는 경쟁도 안 될 만큼의 물량공세에 벌써부터 충무로는 술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그의 만남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구술 심우섭/영화감독 <남자식모> <운수대통> 등 연출

정리 심지현/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