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의 열성팬입니다. 최근 방영되는 시리즈 중 이처럼 다양한 재미를 주는 작품도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이미 전설이 된 <`X파일`>보다 훨씬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싸구려 B급 호러영화,
수퍼 히어로만화, 십대 소프 오페라가 뒤섞여 기가 막힌 장르 칵테일을 만들어 놓은 그릇 안에서 동성애나 학교 총격사건 같은 첨예한 이슈부터
진지하기 그지없는 고딕 로맨스를 거쳐 베리만식 존재론까지 당연하다는 듯 넘나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시리즈를 단순한 십대 취향 액션물이라고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이 작품에 원작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더욱 그렇지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영화의 출시제와 텔레비전 시리즈의 방영제가 달랐으니까요. 비디오 출시제는 <루크 페리의 뱀파이어 해결사>였고 MBC에서 방영될
때 텔레비전 시리즈의 제목은 <미녀와 뱀파이어>였지요. (도대체 누가 이 방영제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이 이 제목을 쓸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솟습니다. 너무 난처해요.)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를 먼저보고 원작영화 <버피>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몇년 동안 애정을 폭폭 쏟아가며
익혀왔던 ‘버피버스’와 이 영화의 설정은 전혀 다른 걸요. 물론 ‘해결사’나 ‘후견인’과 같은 기초적인 설정은 같습니다만, 같은 건 그것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기 전선에서 소외된 틴에이저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척점에 선 골빈 금발머리 치어리더죠. 이 영화의 버피는 너무나도
얄팍해서 텔레비전 시리즈의 코딜리아도 셰익스피어 캐릭터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죽은 흡혈귀들이 텔레비전 시리즈에서처럼 근사하게 가루가 되지도
않고, 윌리엄 S. 버로우즈에서부터 로드 러너 쇼까지 펼쳐져 있는 풍부한 문화적 인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윌로우, 잰더, 자일즈, 페이스,
스파이크와 같은 멋진 조연들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왜 크리스티 스완슨이 감히 자기를 버피라고 부르느냐 말이에요. 버피는 사라 미셸 겔러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불평불만을 무시하고 영화를 보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버피버스’만큼 복잡미묘하게 흥미롭지는
않지만 단순분명한 대조가 꽤 재미있는 효과를 내는 작품이죠. 예쁜 금발을 휘둘러대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캘리포니아의 금발
미녀가 중세의 악귀들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단순무식한 아이러니 말이에요. 물론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유명해진 사람들을 발견하며 ‘와,
쟤는 힐라리 스왱크잖아! 쟤는 데이비드 아퀘트네? 아니, 벤 애플렉이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하고 외치는 재미도 있고요.
그러나 아무리 이 영화를 좋게 보려고 해도, 그 노력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아마 제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진짜 이유는 경건하게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영화는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꼭 ‘좋아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버피> 팬들이
저처럼 상대적으로 초라한 원작영화를 통해 뒤에 나온 시리즈의 우월성을 느끼며 흐뭇해할 겁니다.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