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만화보기를 꽤나 좋아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푸른집’이라는 만화방이 있었는데 돈만 생기면 그곳에 가서 만화를 보곤 했다. ‘돈만 생기면’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돈이라는 게 생길 턱이 없는데도 어째 그리 그 만화방엘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만화만 있으면 코를 빠뜨리고 보고 있느라 어머니한테 혼이 나가게 야단을 듣기도 했다. 아궁이 앞에서 만화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궁이 불이 바깥으로 새나오는 통에 머리카락이 타버린 적도 있었다.
만화책에서 정을 끊을 일은 뜻밖에 일찍 찾아왔다. 한번은 푸른집에서 만화를 빌려다 보다가 어머니한테 들켰는데 어머니가 만화책을 불싸질러버리겠다고 했다. 일찍이 어머니는 기타에 빠져 있던 둘째오빠가 공부는 안 하고 밤이나 낮이나 기타만 친다고 기타를 아작아작 부숴서 진짜로 불을 때버린 적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얼른 옆마당의 감나무 속에(오래된 나무는 등허리가 오목 패 있어 어린애 하나쯤은 그 속에 숨어도 되었다) 만화책을 숨겨놓았다.
그날 밤에 비바람이 얼마나 몰아쳤는지 모른다.
아침에 깨어서 감나무에게로 가보니 상황은 이미 끝이 나 있었다. 바람에 날아갔는지 어쨌는지 만화책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반납할 수 없을 정도로 반은 비에 젖고 반은 바람에 찢겨 달아나고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공포의 ‘푸른집’을 피해 학교에 다니느라 혼자서 길을 돌아돌아 다녀야 했다. 다행히 ‘푸른집’ 주인과 맞닥뜨리지는 않았지만 만화책을 반납하지 못한 강박관념 때문에 꽤 오랫동안 푸른집 주인으로부터 쫓겨다니고 숨어다니는 꿈을 꾸어야만 했다. 실제로 푸른집 주인에게 혼이 난 기억은 없다. 어떻게 그 일이 무마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동안 푸른집 주인이 교실에 찾아올까봐 학교 다니는 것이 매일매일 형벌이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그로 인해 나의 만화보기는 끊어졌다. 푸른집 주인을 연상시키는 것은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만화보기가 다시 시작된 건 그로부터 십년도 더 지난 다음이다. 어찌나 사람들이 <공포의 외인구단> 얘기들을 하는지 어느 날 나도 빌려왔다. 못 되어도 서른권쯤은 됐지, 싶다. 처음엔 빌려다 쌓아놓고선 이걸 언제 다 보나, 했으니까. 그런데 무슨 말씀. 무슨 만화가 그렇게 재미있던지 도대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밤을 꼬박 새워 봤다. 만화를 너무나 재미있게 봐서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도 개봉 첫날 부리나케 쫓아가서 봤다. 나에게는 원작인 만화보다 재미가 덜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너무너무 재미 있었다, 로만 기억되지 그렇게나 재미있게 봤던 만화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으니.
최근에 일본 에니메이션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어린 시절 만화처럼 재미있게 보았다.
오후에 할 일이 잔뜩 있는 며칠 전 오전이었다. 갑자기 하루 일을 다 파투내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줘야 하고, 원고를 써줘야 하고, 그리고 3시에는 공적인 약속까지 있는 그런 오전이었다. 에라, 하는 심정으로 대학로에 가서 베트남 국수를 천천히 먹고 여유를 부리며 씨네큐브까지 가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표를 끊었다. 앞에 만화 얘기를 길게 했던 이유는 나는 이 영화를 만화보듯 빠져들어 봤기 때문이다. 할 일이 잔뜩 있었던 오후에 모든 할 일을 잊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어찌나 재미나게 봤던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영화가 끝나 있었다. 사랑스러운 치히로로 인해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벙긋벙긋 웃기까지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오로지 재미있기만 한 그런 영화는 아니다. 아니 되새겨보면 끔찍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를 지켜주어야 하는 부모는 주인의 허락없이 맛있는 것을 탐욕스럽게 먹다가 돼지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연약한 어린애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마법에 걸리게 되어 있고, 일을 하기 위해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옛 이름을 빼앗기고 새 이름을 갖게 되어 있는 세계에 치히로는 홀로 남게 된 것이다. 치히로는 센이 된다. 치히로라는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영원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센으로 살지만 치히로라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에 이끌리고 화면을 화려하게 채우는 애니메이션에 이끌리며 재미있게만 봤는데 새겨볼수록 긴장감 있게 포진시켜놓은 상징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나에게도 원래 내 이름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궁이 앞에서 만화를 보다가 머리를 태운 그때의 내 이름을 잊어버리고 지금 나는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잊어버린 그 이름 때문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새삼스럽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저력인지 무서움인지가 뒤통수를 쳤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