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숨은그림찾기’ 같은 놀이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주연배우급은 아니지만 얼굴이 상당히 낯익은 조연배우들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를 항상 같이 보는 아내와 함께 그 배우가 출연했던 영화를 먼저 생각해내는 게임을 하는 것. 물론 가끔은 영화가 종영될 때까지 생각이 나지 않아 영화 보기를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두 사람 중 하나는 곧바로 그 배우의 대표적인 출연작이나 최근작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조연배우들의 출연작들을 역추적하다보면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결과물을 얻게 된다는 것. <스타워즈 에피소드2>에 등장한 두쿠 백작의 경우가, 그런 예상치 않은 결과를 얻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두쿠 백작은 다스 시디어스에 하수인으로 무역연합 등을 규합해 모종의 계략을 꾸미는 역할로 등장하는 인물. 요다를 사사한 제다이 출신으로 콰이곤 진을 파다완으로 두었을 정도로 제다이계에서는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제다이 원탁회의가 부패한 공화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는 사라진 전력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처음에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와 아내는 그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냥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군’ 정도로 생각했을 뿐, 그가 다른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 그러다가 한참을 지나서 ‘어딘가에서 많이 본 얼굴인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영화가 끝날 때쯤 돼서야 비로소 그가 다름아닌 크리스토퍼 리라는 사실을 깨달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율’이라는 표현까지 써야 했던 이유는 크리스토퍼 리가 <반지의 제왕>에도 출연했던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잘 나가는 선한 마법사였다가, 절대반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악의 신 사우론에게 협조하는 백발의 사루만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크리스토퍼 리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판타지 서사영화 두편에서 거의 같은 설정을 가진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되어버린 것.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한 이 상황은 다시 한번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두 영화에서 한 노장 배우가 연기한 두 등장인물을 비교해보면서 느낀 그 전율은, 다른 문화상품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토퍼 리를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한 것은, 개인적으로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반지의 제왕>을 제외하고는 그리 인상깊게 본 영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슬리피 할로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장 역할로 출연한 것 이외에는, 최근 몇년간 이렇다 할 출연 작품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1948년부터 무려 250편에 가까운 영화, TV시리즈에 출연했던 베테랑 배우 중 베테랑 배우로 손꼽히는 인물. 1922년 영국에서 태어는 그는 이튼 칼리지를 나와 2차대전 중에 영국 공군조종사로 일한 전형적인 엘리트였는데, 1947년 군에서 제대한 이후 연예계에 진출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연극배우 겸 가수로서 활동하던 그가 본격적인 영화배우의 길을 걸은 건, 1948년 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 <Dracula A.D. 1972>에서 드라큘라를 연기하는 크리스토퍼 리
△ <반지의 제왕>에서 악에 빠진 마법사 사루만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리
△ 크리스토퍼 리는 <스타워즈 에피소드1>에서 다스 시디어스의 하수인 두쿠 백작을 연기했다
그뒤로 10여년 동안 무려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스타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그가,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계기는 1958년작 <드라큘라>에서 선보인 드라큘라 연기였다. 그뒤로 ‘살아 있는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얻으며 무려 11편의 영화에서 드라큘라를 연기했고, 수십편의 공포영화에 주연을 담당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빈센트 프라이스와 함께 세계 공포영화계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은 그는, 그러나 공포영화에만 전력하지 않았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어를 할 수 있는데다가 천부적인 운동감각을 가지고 있어, 여러 유럽국가를 돌아다니며 정말로 다양한 영화들에 출연했던 것. 재미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그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두 가지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셜록 홈스와 영국의 찰스 1세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모두 연기해본 유일한 연기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스턴트 연기를 모두 스스로 해내, 스턴트협회의 명예회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 온 이후 그의 행보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 <그렘린2> <폴리스 아카데미7> 등 허접한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틈틈이 TV시리즈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96년는 TV에서 방영된 <호러영화 100년사>(100 Years of Horror)의 내레이션을 맡은 것이 할리우드에서 한 것 중 가장 의미있어 보이는 활동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그가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 에피소드2>라는 두 대작에 중요한 악역으로 출연했고 계속 이어질 두 영화의 속편들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점은, 그에게 그간의 부진을 깨끗이 만회하고 자신의 연기 인생을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 분명하다. 비록 황혼에 접어든 배우이기는 하지만, 그의 연기에서 힘과 열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이철민/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크리스토퍼 리 공식 홈페이지: http://christopherleew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