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빤지 위에 벽돌을 세운다. 그리고 조금씩 판자를 들어올린다. 점점 경사가 가팔라지고, 어느 순간 벽돌이 미끄러져 내린다. 중력과 마찰력, 마찰 계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초보적 실험이다. 그런데 미끄러지던 벽돌이 갑자기 정지한다. 판자를 더 높이 들어올려봐도 꼼짝하지 않던 벽돌은 급기야 부들부들 떨더니 경사를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을 뛰어넘는 이 힘은 물론 마법이다.
아주 먼 옛날, 아니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마법은 널리 신봉되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마법은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중력과 마찰력 같은 개념에 마법이 끼어들면 곤욕스럽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 못하는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해서 복잡하고 귀찮아지느니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현대사회에서 마법은 봉인되었다. 비과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학문 저편으로 영원히 추방되었다.
‘스팀 펑크’는 SF의 하위장르 중 하나다. 스팀 펑크 세계는 기본적으로는 산업혁명기와 유사하다. 하늘에는 비행선이 날아다니고, 마을에는 증기기관이 막 도입되었다. 다양한 과학적 기제들이 개발되기 시작한 산업화 초기 단계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산업혁명기와는 달리 이전 시대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마법이나 연금술 같은 게 아직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인정받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서로의 근거를 위태롭게 하는 두 가지 법칙이 동시에 존재한 사회는 없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처럼 전혀 달라보이는 체제라도 외양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세계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다. ‘스팀 펑크’의 매력은 바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두 세계의 공존에 있다.
<아케이넘>은 스팀 펑크 세계관에 기반한 롤플레잉 게임이다. 스팀 펑크 기반의 게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개 마법을 쓰는 세계에 기계 아이템을 슬쩍 끼워넣는 정도의 무늬만 스팀펑크였다. 하지만 <아케이넘>에선 짝퉁 스팀 펑크의 우려는 내려놓아도 좋다. <폴아웃>을 만들었던 제작자들이 모여 탄생시킨 게임이기 때문이다.
<아케이넘>의 주제는 과연 모순과 혼란의 스팀 펑크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다. 기존 가치관이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관이 급박하게 대들어오는 격변하는 세계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남을 없앨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새로 도입된 증기기관에 자기 고객을 빼앗길 거라고 믿는 엘프 마법사와 그런 마법사가 미쳤다면서 마을에서 쫓아내자고 떠들어대는 드워프 기술자 사이에서 치열한 반목이 벌어진다. 혼란을 틈타 잇속을 차리는 졸부들이 있고, 이들의 천박한 삶에 빌붙어 피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에서는 엄청난 부가 모이는 한편 그만큼 다른 쪽에서는 모든 것을 빼앗긴 헐벗은 사람들의 증오감이 고여간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빛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게 다양한 종교와 신들이다.
혼란 속에서 과연 무엇이 선인지 또 무엇이 악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런 세계에서 스스로의 믿음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아케이넘>의 스팀 펑크 세계는 건조하게 질문을 던진다. 이는 핵전쟁 이후 삶을 그렸던 <폴아웃>과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폴아웃>이 살아남은 자들의 쇠잔한 힘들의 수동적 충돌이었다면, <아케이넘>은 산업혁명이라는 앞으로 치달리는 변화 속에서 부딪히는 폭발적인 힘들의 능동적 충돌이라는 점에서 좀더 박진감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