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 박구 감독과 임시계약으로 일하면서 소속이 필요했던 나는 서둘러 영화인협회에 가입을 했어. 60년대 당시 협회인준을 받아 활동하던 스틸맨은 대략 스무명 정도였어. 호황을 누릴 땐 서른명 정도로 늘어났고. 1년에 4∼5편 정도 찍으면 먹고살 만했지. 한편당 150만원씩 받는 건 20년 전이나 그뒤나 변함없지만. 요즘은 스틸맨의 수가 다시 초기 규모 정도로만 유지되고 있다더군. 20년간 열명이 넘게 이직했고, 막내 스틸맨이 나이가 예순이야. 이런 실정이니, 신·구간 단절현상이 최고조에 이른 거지. 젊은 친구들은 굳이 협회를 통한 신분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아. 신선한 감각과 좋은 기계, 기동성에 의존한 자신감을 갖추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잖아. 그네들과 경쟁하려면 기자재부터 바꾸고, 탈것부터 마련해야 하는데, 기천만원이 들어가는 투자가 맘처럼 쉬운 일은 아냐. 그러니 노장들은 애당초 경쟁을 포기하고, 어느샌가 현장에서 슬그머니 잊혀지는 거지. ‘현역’이라는 말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생명의 끈 같은 거지만.
낡은 카메라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던 얼마 전,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에서 병영 관련 휴먼드라마 <아름다운 동행>(2002)을 제작한다며 스틸을 부탁해왔어. 최재성이 최전방 해안중대장으로 등장해 민간인 처녀와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운다는 내용이었지. 한국전 참전용사로 화랑무공훈장을 비롯, 여러 번 훈장을 수여받은 경력에다 당시 드라마 제작에 관여한 진흥공사 관계자들의 추천 덕분에 내게 스틸 일이 떨어진 거야. 카메라를 들고 다시 현장에 선다는 것은 즐거움 이상이었어. 94년 <어린 연인>(이성수 감독, 이경영·우희진 출연)의 현장을 끝으로 스틸을 접었던 내가 ‘여전히 현역’이라는 기쁨의 훈장을 가슴에 단 계기가 되었으니까.
당시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서 있노라면 으레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어. “눈이 침침해서 포커스나 제대로 맞추겠어?” 젊은 사람들 입에서 터져나오는 우려의 목소리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보여줄 수밖에. 그게 내 대답이야. “이보게들, 미안하지만 아직 난 끄떡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대한민국 최고참 현역 스틸맨’이라고 우길 자신은 없어. 지금은 그저 한국영화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내 사진들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남기는 일과 오랜 지기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현장에 있다보면 갖가지 위험에 직면하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잊기 힘든 몇 가지 ‘사건’들이 있어. 박구 감독과 <물망초>(1960)로 인연을 맺은 뒤 1963년 <백설공주>를 찍을 때였어. 영화 내용상 광활한 눈밭이 필요했던 터라 대관령 정상 부근에서 촬영준비를 했지. 백설공주 역을 맡았던 김지미가 눈밭에서 아버지인 고을 태수 김동원과 재회하는 장면을 찍으려는데 다들 걱정이 태산인 거야. 그때가 3월 말인가 4월 초였는데, 봄꽃이 피는 마당에 과연 큰 눈이 내려줄까 싶었지. 강원도의 특수한 기후를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겠지만, 갑자기 눈이 내리려니까, 금세 한길 높이로 쌓이는 거야. 다들 쌓이는 눈을 보며 입이 헤벌어졌는데, 고생은 정작 그때부터였어. 푹푹 파묻히는 눈 때문에 스탭들의 움직임이 엄청 둔해진 거야. 카메라가 지나는 길의 눈은 대충 치웠지만 쌓이는 눈의 속도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어. 그때, 카메라나 조명기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이 많은 쪽만 따라 걷던 내가 그만 눈 속에 푹 파묻힌 거야. 처음엔 혼자서 일어나보려고 한 것이 더욱 눈 속으로 파고들어요. 버둥대면 댈수록 바닥에 발이 닿지는 않고, 밑으로만 빠져들었어. 결국 덜컥 겁이 나면서 소리를 질렀지. 그 순간엔 꼭 얼어죽는 줄만 알았어.세기상사와 손을 잡고 <결사대작전>(1969, 고영남 감독)을 찍을 때의 일도 아찔하긴 마찬가지야.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박암 등 쟁쟁한 남우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기쁨을 안고, 촬영지였던 인천의 팔미도로 향했어. ‘인천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였기에 각종 총기와 실탄들, 전투신에 필요한 무기들을 공수해서 팔미도로 날랐지. 총격전 장면을 위해 육군 조교의 시범 아래 배우들이 몇번 리허설을 가졌고, 바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어. 배우들이 특정한 대상없이 한 방향으로 실탄이 든 총을 무더기로 발사하는 장면이었는데, 한 배우가 쏜 총알이 바위에 빗맞고 유탄이 되어 날아온 거야. 카메라를 누르려던 오른손 엄지를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눈썹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지. 순간 심장이 딱 멈추는 거야. 손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소리가 안 나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있기를 몇분, 곧 정신을 수습하고, 얼른 지혈을 했지. 그때 상황을 눈치챈 사람은 제작부장이 유일했어. 그의 얼굴이 하얘지는 걸 보고 얼른 말렸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마.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제작부장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을 못하더라구.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54년간 영화 현장사진에 몸담음<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