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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이 쓴 `눈물나는`제작일지(1)
2002-07-19

NG인지 OK인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에라, 큰소리로 OK

장항준 감독의 특기는 `구라`다. 그걸로 지금껏 먹고, 입고 살아왔다. `구라`를 품지 않으면 하루를

못 견딜 정도다. 그가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지난해 겨울, 서울역 뒤편 촬영현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여전히

유쾌한 만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세팅을 하자마자 철수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는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아시바를 뜯어 나르는 스탭들을

특유의 유머로 독려하는 정말 이상한 감독이다. 그런 낙천성이 없었다면, 메가폰을 쥐기까지의 시련을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구라`는 그에겐

세상과 맞서는 일종의 `보약`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촬영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겪고 난 뒤, 말수가 지나치게 줄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만 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얼마 지나자 그와 연락할 수 있는 휴대폰조차 끊겼다. 그런 일이 있은 뒤 4개월이 지났고,

그는 `시끌벅적한` 영화 한편을 세상에 내놓기에 앞서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꼭꼭 눌러쓴 거친 현장일지를 <씨네21>에 보내왔다.

편집자

장항준/ <라이터를 켜라> 감독

프롤로그 - 영화 하나 엎고, 이제 어디로 가지?

>> 2001년 봄

죽을 맛이다. 준비하던 <불타는 우리집>이 엎어졌다. 캐스팅이라는 장벽을 뚫지 못했다. 지난 1년간 모두가 고생했는데. 믿고

따라준 스탭과 연출부들 볼 면목이 없다. 나란 놈은 지독히도 운이 없다. 스탭들과 가진 술자리. 내색하진 않지만, 속으로 피눈물을

쏟고 있다. 급기야 감성이 풍부한(그놈의 감성, 아니 술이 문제다) 연출부 한놈이 울음을 터뜨린다. 옆에 있던 제작실장도 뒤따라

흐느낀다. 씨팔…. 욕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결국, 이대로,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는구나.

1시간쯤 지났나.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다. 이제 그따위 영화는 집어치우라신다. 벌써 3년째 같은 말씀이다. 서른 넘은 아들

생활비까지 챙겨줘야 하는 아버지로선 답답하기도 하실 테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누라와 나 잘되기만을 기도하는 어머니. 그들을

볼 낯이 없다. 그런데도 술자리가 끝날 무렵, 난 대책없는 호기를 부리고 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나 내일부터 다시 시나리오

쓴다. 다들 같이 갈 거지?” “어디로 갈 건데?” 이춘영 PD의 되물음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힌다.

>> 2001년 5월26일

<우아하고 감상적인 생활>이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건 될까. 이번에도 1∼2년 고생하다 아무 소득없이 끝날지도 모른다. 무력감은 나날이 커져간다. 그러던 참에 이관수 프로듀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7년 전, 익영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알게 된 형이다. 당시엔 김동주(현 코리아픽처스 대표) 형이랑 붙어서 일하다보니 관수 형과 친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서운한 감정이 삭질 않았을 텐데, 관수 형은 그 이후에도 가끔씩 안부전화를 하곤 했다. “형, 오랜만이네.” “응, 얼굴 한번 뵈주라.” 말을 하지 않지만, 같이 일을 했으면 하는 눈치다. 그러나 일전에 거절당한 작품 생각이 나서 냉큼 달려갈 마음은 일지 않는다.

<라이터를 켜라>와의 조우, 영 안땡기네

>> 2001년 6월3일

에이스타즈 사무실. 관수 형이 내게 시나리오 하나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모니터 좀 해달라는 것이다. 꼼꼼히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한다. <라이터를 켜라>. 웃기는 대목이 있긴 한데, 별로 안 끌린다. 솔직히 심심하다고 관수 형에게 털어놓는다. 너무했나. 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 손을 잡고서 어딘가로 끌고 간다. 술집이다. 알코올로 승부를 볼 심산인가. 나도 뒤지지 않는 술꾼이다. 그런데 관수 형이 앉자마자 바로 말을 꺼낸다. “니 인생 나한테 한번만 걸어라.” 형은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온다. 나에게 연출을 맡으라는 건데, 이건 생각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 남의 시나리오로 데뷔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그래도 면전에서 대뜸 “싫다”고 하는 건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20분 정도 고민하는 것 같은 연기를 했다. 그리곤 “싫은데”라고 말했다.

>> 2001년 6월5일

한번만 더 읽어봐라. 그럼 맘이 바뀔 거다. 관수 형은 집요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사실 궁한 처지였던 그는 매일 전화를 했다. 나 또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간이 나면 집에서 시나리오를 이리저리 들춰봤다. 근데 마음이 슬슬 요동칠 전조를 보인다. 보면 볼수록 뭔가가 있다. 조금 손보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맥이 통할 것도 같다. 사건을 둘러싼 군상의 묘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줄 수도 있겠고. 거기다 철곤 같은 캐릭터에 인간적인 면을 좀더 부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깡패라고 불리지만,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남편일 터인데. 그런 면을 드러내면 진한 페이소스도 저절로 우러날 것 같다. 조심스레 관수 형한테 전화를 건다. “응, 나야. 있잖아, 나 그거 할게. 그런데 (한참 침묵) 얼마 줄 거야?” “많이 줄게 임마, 빨리 나와.

>> 2001년 7월1일

처음부터 박정우가 맘에 안 들었다. “난 감독이 써달라고 하는 대로 써줘.” 그는 초면에 날 보고 그렇게 말했다. 장사꾼 같은 말투가 싫었고, 그런 말을 듣고보니 생김새도 영 믿음이 안 간다. 못 먹어도 자존심이라고, 그동안 시나리오 작가라는 자부심을 체내에 농축해온 나로서는 그런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관수 형도 눈치를 챘는지, 박정우와 나의 술자리, 정확히는 부부동반 모임을 주선한다.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실타래는 엉뚱한 만남에서 풀렸다. 마누라 은희와 박정우의 와이프될 사람이 죽이 맞은 것이다. 술판은 우리집까지 이어졌고, 은희는 박정우의 미래의 아내에게 방을 제공하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당시 자취방을 구하던 그녀에게 남는 방이 있다며 유혹(?)한 것이다. 결국 그녀가 집을 구하기 전까지 석달 동안 이상한 동거가 이뤄졌고, 난 박정우의 진심을 이해할 기회가 빈번해졌다.

>> 2001년 7월23일 여의도의 한 호텔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정우와의 전쟁도 재개됐다. 그날의 술자리 이후 한때 그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오해였음을 알았고, 그날을 기점으로 친구 하기로 했지만, 시나리오는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정우의 돌변한 태도였다. 본색을 드러낸 건지 모르겠지만 정우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내 색깔을 집어넣으려고 캐릭터의 비중을 달리 가져가려 하자, 그는 강력히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기존 시나리오대로 밀고 가자는 그의 말발을 당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쨌든 녀석은 흥행작가였고, 난 겨우 서울 24만 작가였으니까. 나 역시 정우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고집을 꺾긴 싫었다. 단순한 소동극을 보여주는 것만으론 양이 안 찼다. 정우에게 나 혼자 하겠다고 통보해놓고 나니 아예 처음부터 내가 다시 쓸까 하는 욕심도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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