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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1)
2002-07-19

도매가로 미래세계를 팝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세편의 공통점은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각 작품의 스케일과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이다. 명망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기꺼이 스크린에 구현하고

싶어하는 유혹적인 미래세계를 빚어낸 필립 K. 딕은 세련된 문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SF작가였다. 미래의 살인을 방지하는 시스템의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미래사회의 딜레마를 탐구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필버그라는 필터를 통과해 7월26일 관객과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21>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스템’에 접속하기 전, ‘필립 K. 딕 리포트’를 먼저 공개한다.

편집자

report1 ┃딕의 미래세계, 환상 그 이상의 환상

1. 최초로 필립 K. 딕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정답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하지만 왜 나는 아직도 80년에 나온 텔레비전영화 <천국의 녹로>라고 박박 우기는 것일까? <천국의 녹로>의 원작자는 필립 K. 딕이 아니다. 딕만큼이나 중요한 SF/판타지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이 영화(또는 르 귄의 소설)를 보면 정말 필립 K. 딕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가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두 세계는 기괴한 충돌을 일으킨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은 자기가 무엇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립 K. 딕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재능있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작가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필립 K. 딕의 업적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계는 우리를 삼켜버렸다.

필립 K. 딕은 작가의 영역을 넘어 장르가 되었다. 우린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수많은 가상 현실물들의 원조를 윌리엄 깁슨과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깁슨이 만들어낸 사이버스페이스는 차갑고 건조한 매트릭스에 불과했다. 깁슨이 제공한 것은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역동적인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미지는 대부분 깁슨보다 필립 K. 딕의 덕을 더 보고 있다.

무엇이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생명력 넘치는 괴물로 만들었을까? 모든 꿈들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환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강렬하게 만들었던 건, 그가 단지 공허한 가상세계를 지어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고, 그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그에게 당연한 현실세계의 또 다른 묘사였다. 그가 한 유명한 말처럼 ‘리얼리티란 관점에 불과했다’.

report2 ┃공포증과 약물, 뒤엉킨 사생활

2.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란성 쌍둥이 누이인 제인은 태어난 지 6주 뒤에 죽었다.

딕은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일평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다. 빈맥증상이 있었고 천식환자였으며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약물중독자였고 끝도 없이 잘되지도 않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가끔 자살을 기도했고, 공포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캘리포니아 안을 빙빙 도는 짤막한 여행을 반복했다. 그는 환영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종 그의 경험은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싸구려 사이비 종교풍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남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병을 앓는 남자였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며 평생을 보낸 약물중독자였다. 그가 리얼리티와 아이덴티티라는 대상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그 둘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한 것이 못 됐다.

필립 K. 딕의 작품들 표지. 왼쪽부터 <스캐너 다클리>

높은 성의 사나이><발리스>. <판타스틱 유니버스>는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실렸던

잡지다.

그가 살았던 세계 역시 그를 단단한 현실에 잡아두지 못했다. 그가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50년대는 미·소 냉전 속에서 다양한 편집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던 때였다. 50년대의 공포증이 넘어가자 60년대의 히피문화와 약물유행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정신나간 사건들을 체험한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맨 정신으로 있기 힘든 곳인 캘리포니아였다. 1974년 이후 그가 겪었던 종교적 경험과 그런 경험이 투영된 그의 후기작들은 그가 얼마나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였던가를 증명한다. 그가 동료인 론 허버드처럼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교주로 나서는 대신 소설가 직업에 붙어 있었던 게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소설 vs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2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룻거 하우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가장 먼저 나온 필립 K. 딕 영화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딕의 소설을 각색한 많은 영화들처럼, 원작과 소설의 유사점은 비교적 약한 편이다.

심지어 영화는 제목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Blade Runner’는 원래 앨런 E. 너스의 인구폭발의 장수사회를

다룬 SF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데이비드 피블스의 최종 각본은 원작의 필립 K. 딕풍의 주제와 소재들을 대폭 삭제했다. 영화는 소설이 다루는 마사교와 같은

종교적 설정, 핵전쟁 이후 살아 있는 생물체들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군상,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의 건조한 딕식 미래 묘사가 줄어든 대신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기독교 상징으로 가득한 컴컴한 미래 버전 필름

누아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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