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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3)
2002-07-19

도매가로 미래세계를 팝니다

report5 ┃도매가로 정체성을 팝니다?

5. ‘리얼리티의 허약함’은 감각과 기억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아이덴티티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단편인 <사기꾼 로봇>(The Imposter)(최근에 게리 시니즈와 매들린 스토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은 이 주제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예다. 과학자인 주인공은 그가 자신을 살해하고 그를 위장한 알파 센타우리 외계인들의 스파이 로봇이라는 모함을 받고 탈출한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것은 진짜 자신의 시체고 그가 로봇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알파 센타우리에서도 보일 만큼’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그의 거창한 최후는 이 부실한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허망함을 알아차린 남자의 충격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화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모두 기억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이식된 가짜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도 그 기억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주인공은 여행에 대한 가짜 기억을 이식받으려 하다가 사고를 일으키고 그 상흔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이 뒤섞이는 요란한 혼란 속에 말려든다. 앞에서 다룬 의 주인공도 이들만큼이나 아이덴티티의 혼선을 겪는다.

종종 딕의 세계에서 아이덴티티 문제는 정신분열과 다중인격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A Scanner Darkly>에 이중인격의 혼란을 겪는 마약중독자 주인공 밥 아처가 대표적인 예. 그렇게 볼 때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각색한 <토탈 리콜>이 사악한 원래 자신과 새로 주입된 임시 인격과의 대결로 흘러갔던 건 꽤 필립 K. 딕식 설정이었다.

여기서부터 아이덴티티의 혼란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좀더 보편적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사기꾼 로봇>에서, 이식된 기억은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허물었다. 단편 <그래, 블로벨이 되는 거야!>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의 모습을 오가는 육체의 변형이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가져온다. 암울한 묵시록인 <두 번째 변종>은 전형적인 냉전시대 편집증에 대한 공포물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기계가 인간의 불쾌한 자리까지 물려받는 성급한 진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딕의 세계에서 인간, 로봇, 외계인의 경계는 의미를 잃고 공포에 떨고 혼란스러워하는 정신만이 남는다.

report6 ┃SF작가, 혹은 예언자?

6. 론 허버드와 마찬가지로, 필립 K. 딕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자질이 다분했다. 고맙게도 그는 그의 비전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진짜 종교를 만들어 교인들의 푼돈을 챙기려는 음모 따위는 품지도 않았다. 하긴 그럴 능력이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교주의 카리스마는커녕 자기 정신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였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조직화된 종교는 예지자들이 아니라 말짱한 정신의 치밀한 장사꾼들과 정치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사이비 종교의 복음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VALIS> <The Divine Invasion, Radio Free Albemuth>로 이어지는 후기작들은 전 우주적인 신비한 정신과 소통하는 예언자들과 기존 종교들이 북적거리는 스토리를 통해 일종의 종교적 비전을 전파하고 있다. 이 비전이라는 것이 너무 괴상하고 개인적인 경험에 치중하고 있어 결코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딕의 비전은 종교적이기는 하지만 그 종교는 미치광이의 종교다.

이런 딕의 예언자적 성격은 예지 능력에 대한 그의 집착과 연결된다. 예지 능력은 그가 아이덴티티의 혼란만큼이나 자주 써먹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마약중독자 미치광이 일인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미래를 본다는 행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의 컴컴한 코미디 <Martian Time-Slip>도 그렇고,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화된 정신나간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세계에서 미래란 일반적 타임머신물에서 그런 것처럼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옭아매는 계시이며 환영이다.

report7 ┃하루키와 스티븐슨을 거느리고…

7. 필립 K. 딕의 소설이 영화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SF영화의 유행과 특수효과의 발전뿐만 아니라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사이버물의 유행도 옛 딕의 유산을 재발굴했다.

그러는 동안 딕의 혼란스러운 미로는 새로운 후계자들을 찾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닐 스티븐슨 같은 신세대 미로세계의 창조자들은 종종 딕의 후예자로 불렸다. 딕의 정신나간 편집증은 <엑스파일>과 같은 시리즈나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와 같은 영화들에 의해 계승된다. 물론 그뒤에 나온 수많은 삼류 사이버펑크영화들 역시 딕의 사생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립 K. 딕은 결코 과학적 예언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세계는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아서 C. 클라크가 정밀하게 예측한 금속성의 차가운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보다 필립 K. 딕이 약먹은 중에 정신없이 써갈겼던 혼란스러운 난장판에 더 가깝다. 새로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격과 현실이 가지를 치며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필립 K. 딕의 세계를 모방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딕은 결국 예지자였다. 듀나/ djuna01@hanmail.net

소설 vs 영화

┃스크리머즈┃감독 크리스천 더과이 출연 피터 웰러, 로이 듀피스, 제니퍼 루빈

<두 번째 변종>을 각색한 <스크리머즈>는 비교적 작은 영화로,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

리콜>과 같은 야심은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세계전쟁 이후 인간과 대립하게 된 로봇과 싸우는 인간들의 전쟁을 다룬 원작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지만, 후반부의 할리우드식 감상주의와 개심은 원작의 날카로운 공포와 아이러니를 많이 약화시킨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톰 크루즈, 캐스린 모리스,

피터 스토메어, 막스 폰 시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최근 나온 필립 K. 딕 영화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과시하는 영화지만, 가장 딕의 분위기가

약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오히려 딕보다는 히치콕의 느낌을 더 강하게 풍긴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존 버캔의 소설

을 각색할 때 주인공이 스파이 집단에 쫓긴다는 기본 설정만 남겨놓고 모두 바꾼 것처럼,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원작에서 중요했던 예지의 패러독스는 모두 지워버리고 좀더 정통적인 스릴러로 변형시켰다. 히치콕 영화에서 원작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단서였던 39계단이 의미없는 맥거핀으로 추락했던 것처럼 스필버그 영화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원작과 같은 큰 의미는

없다. 여전히 좋은 영화지만 필립 K. 딕의 독자들은 상당히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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