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다. 전에는 재미있게 보던 프로그램들이 영 시시하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지간한 서스펜스영화보다 더 가슴 졸이는 승부의 세계를 경험했고, 웬만한 시대극보다 더 벅찬 감동을 맛본 사람들에게 월드컵 이후의 ‘평온’은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방송사들도 사람들의 공허한 심정을 알았는지 월드컵의 감동을 돌이키는 각종 특집을 쏟아내고 있다. 히딩크 감독과 대표선수들에 대한 각종 다큐멘터리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졌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태극전사’들을 소재로 하거나 그들을 직접 등장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특히 김남일, 송종국 등 이른바 ‘월드컵 스타’들은 요즘 스포츠 뉴스보다 오히려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가십뉴스에 더 자주 등장한다. 이런 과정에서 KBS2TV 심야오락 프로그램 <서세원쇼>가 네티즌들의 도마에 올라 심한 비난을 받았다. 선수들의 가족을 게스트로 초대해 특정 선수의 과거에 대해 농담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홈페이지 게시판을 마비시킬 정도로 격렬했던 네티즌들의 항의는 이른바 ‘가짜 사과문’ 파동을 겪으면서 더욱 격앙됐다. <서세원쇼>는 덕분에 한 시청자단체로부터 ‘최악의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밖에도 최근에는 송종국이 SBS < 한밤의 TV연예>에서 자신의 전화 인터뷰가 열애설에 대한 것만 발췌해 방송됐다는 불만을 토로하며 앞으로 연예정보 프로그램과의 인터뷰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표팀의 주전 미들필더였던 이영표 역시 자기 가족들이 등장하는 KBS1TV <인간극장>의 방송을 거부해 결국 다른 내용으로 대체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그래서 몇몇 월드컵 스타 선수들은 아예 방송과의 인터뷰 자체를 거부하거나 미디어에 가족들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어찌보면 이런 모습 자체가 ‘월드컵 4강’이라는 쾌거를 이룬 뒤의 유명세일 수도 있고, 선수들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이 쏠리면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월드컵과 관련된 프로그램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의 월드컵 스타에 대한 호들갑은 아무리 과도기임을 감안해도 전혀 달갑지가 않다. 따지고 보면 축구선수를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중요 아이템으로 다루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아무리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유사성이 많은 분야라고 해도 둘은 엄연히 다르다. 관중석에 앉아 대표팀을 응원하는 연예인을 취재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마치 인기 댄스 그룹을 취재하듯 대표 선수들의 행적을 6mm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더구나 그 카메라를 통해 비친 선수들의 모습에는 그라운드에서 흘리던 굵은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가 없다. 대신 약삭빠른 ‘스타 시스템’의 현란한 후광만 있을 뿐이다. 멋있고, 매력적이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고…. 그 어디에도 그들이 가진 축구선수로서 경기장에서 보여준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더욱 고약한 것은 대표 선수들의 과거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상업적인 휴머니즘과 값싼 감동으로 포장하는 프로그램들이다. 몇몇 선수들은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의 천편일률적인 소년 시절 이야기처럼, 역경과 고난을 탁월한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겉으로는 감동과 눈물을 강요하면서 그 이면에선 선수들의 사생활과 가족들의 모습을 아무 보호막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이 프로그램들의 무신경함과 잔혹성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미디어의 위선적인 이중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김남일 선수의 젊은 시절 방황이 마치 츄잉검처럼 온갖 프로그램에서 얘깃거리로 ‘씹힐 때’(조금 천박한 표현이지만 솔직히 이 단어가 가장 정확하다), 가슴 시린 감동 대신 안쓰러운 연민을 느낀다. 저 선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이 재단되고, 윤색되는 것을 감내하기 위해 거센 태클에 발목이 밟히는 고통을 감수했는가라는 씁쓸한 연민이다.월드컵 4강의 업적을 이룬 선수들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보내는 것은 결코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월드컵 한달 뒤에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돌변하는 ‘냄비근성’보다는 오히려 조금은 지나치다 싶어도 그들과 그들이 뛰는 K리그에 관심과 사랑을 보내는 것이 백번 낫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좋아했던 것은 영상 미디어의 칼질을 통해 생기를 잃고 박제화된 대중스타가 아니다. 그라운드에서 소리치고 달리는 심장이 뛰는 ‘축구선수’들이다. 제발, 이번만은 이들을 경기장에서 울리는 관중의 환호성 속에 그냥 놔두자.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ports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