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축구에 대한 열기로 채워져 있는 신문 한 귀퉁이에 일본 산카이주쿠 부토(舞蹈)무용단이 내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언제 한번 꼭 보고 싶은 공연이었는데도 그냥 넘겼는데 나보다 나중에 기사를 읽은 함께 사는 사람이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였다. “시체들의 기괴한 몸부림”이라는 헤드라인을 본 순간 속으로 그 사람의 관심을 끌겠군, 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부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시인 김혜순씨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여간해서 주관적인 평을 잘 하지 않는 편인 그가 한마디로 “굉장하다”고 했다. “온몸에 회칠을 하고”라며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모습이 떠올라 신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 R석이 3만원이라고 해서 다른 공연보다 저렴하네, 생각하며 선뜻 R석으로 하루 전에 예약을 했다. 당일 아침에 그쪽에서 전화가 왔다. 어제 내 예약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아르바이트생인데 공연료를 잘못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불한 돈의 좌석은 A석이고 R석으로 하려면 2만원을 더 추가해야 한단다. 그러면 그렇지, 싶은데도 R석에 앉아볼 생각을 하고 있다가 A석에서 봐야 한다니 부당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는 사람과 동반하려고 4장을 예약해놓은 터였다. 전화를 걸어온 쪽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기색이 아니었으면 화라도 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어째야 하나 잠깐 망설이고 있는데 그쪽에서 죄송해요, A석 중에서 최대한 좋은 자리로 배치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과정을 지루하게 이야기하는 건 이게 바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부토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탄생한 일본 전위무용의 한 계보다. 부토의 창시자는 부토를 설명하기를 “시체가 일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했다. 짐작을 하고 갔는데도 온몸에 회칠을 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 느렸다.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을 벌떡 일어나고 싶게 할 정도였다. 내가 정상적으로 서거나 걸을 수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 확인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만큼 무표정해서 허무했으며 손이나 발 허리는 충격을 받아 기형이 된 사람들의 그것처럼 겨우겨우 움직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태아를 연상시켰고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음향은 팔에 소름을 돋게 했다. 무표정의 육체가 비틀렸다 풀어질 때마다 금이 간 것처럼 움직이는 뼈를 한 시간도 넘게 지켜보는 어느 순간 나는 왜 엉뚱하게 월드컵 기간의 광화문 네거리가 떠올랐는지. 독일과 경기가 있던 날이었던가. 사직동의 친구네 집에서 함께 경기를 보고 끝난 뒤에 구경 삼아 광화문에 나가 보았는데 경기는 졌는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마음껏 노래부르고 걸어다니고 외치고 뛰어다녔다. 부토의 느리고 고통스럽고 기괴한 움직임 위에 왜 광화문 네거리에서 마주쳤던 힘차고 발랄하고 거침없던 육체들이 겹쳐졌는지.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지난 한달과 같은 열광의 나날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다. 느리게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유지시킨다. 지루하고 재미없어 이따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불시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가까운 누군가 불치의 병을 앓게 되면 새삼 별일없이 유지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깨닫게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통도 열광도 아닌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때인 것 같다.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