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된 걸 안 건 1945년 8월18일경이었어.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두 번째 전쟁을 경험할 때까지 여전히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어. 그저 매일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게 바람이라면 바람이었지. 전쟁이란 사람을 지극히 수동적으로 바꿔놓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능동적으로 내 삶을 꾸릴 기회가 올 것이라고 늘 생각했어. 그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나를 지탱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두해 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술을 놀리지 않으려고 이 일 저 일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 그때 이화여고에서 사진 한장이 날아왔지. 어린 태가 가시지 않은, 이화여고 학생 유관순의 사진이었어. 당시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씨가 순국녀 유관순을 기리기 위해 유일하게 학교에 남아 있던 작은 명함 사진을 들고와 크게 확대 복사를 부탁한 거야. 어려울 것이 없었으므로, 정성을 들여 확대를 시켜줬더니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안고 돌아갔어. 나중에 얘길 들으니, 지금껏 학교 금고에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게 이화여고와 인연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와의 인연이 다가왔지. 당시 <아리랑>(1936), <청춘부대>(1938) 등에서 배우로 활약하는 동시에 감독을 겸업하던 윤봉춘 감독이 영화 <유관순>의 제작에 들어갔어. 유관순을 기리는 영화다보니 이화여고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뭔가 도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생들을 대거 엑스트라로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나봐. 촬영장이 경주였는데, 200여명의 여학생들이 그리로 내려갈 채비를 했어. 일종의 수학여행을 겸한 촬영 일정이었지. 그때 이화여고 미술부 선생이 현장 수업의 일환으로 자신의 부원들을 데리고 경주에 함께 내려가기로 한 거야. 그리고 신 교장의 소개로 나에게 연락을 준 거야.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달라고. 그럼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물론 술을 좋아하는 나를 알기에 “좋은 술 한잔에 콩잎 안주”라는 유혹도 빼놓지 않았지. 일도 하고 여행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일 것 없이 허락을 했어.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인 줄도 모르고. 경주에 내려가 학생들의 사진을 찍어주는데, 현장에 있던 윤봉춘 감독이 날 보더니 “사진사라… 잘됐네, 이리 와서 현장 사진 좀 찍어주게” 하는 거야.그땐 스틸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셔터를 눌러댔어. 그리곤 곧이어 전쟁이 터졌지. 그렇게 다시 군에 들어갔다가 제대를 하기까지 꼬박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그간 금화전투, 금성전투, 백마고지 입성을 겪었고, 나는 무쇠처럼 단련되었지. 군대생활을 마치고 나온 내 나이 34살. 무엇을 시작하기에 그리 이른 나이는 아니었어. 뭐든 해야겠다고 살 궁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당시에 길거리마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적댔어. 요즘의 ‘교차로’나 ‘벼룩시장’처럼, 그땐 구인, 구직 소식이 빼곡히 실리던 <평화신문>이라고 있었어.
여느 실업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신문>을 뒤적이던 어느 날, 눈을 잡아끄는 광고를 보게 된 거야. 수도영화사에서 촬영 스튜디오, 편집실, 녹음실, 현상실, 분장실, 심지어 수중 촬영장까지 갖춘 대규모 안양촬영소를 세우면서 각 부문 영화스탭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어. 그중에 스틸도 있더라구. ‘됐다.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거다. 기왕 응모할 거면 꼭 붙자.’ 단단한 각오로 면접에 임했어. 당시 응시자가 몇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스틸 부문에 뽑힌 사람이 다섯에 불과한 걸 보면 대단히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었지. 수도영화사에 입사한 이후, 간단한 교육을 거쳐 바로 현장에 투입돼 <생명>을 찍었어. 이강천 감독, 김학성 촬영기사와 문정숙, 김승호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모여 만든 영화 <생명>은 두달여의 제작 기간 중 대부분이 밤샘작업이었을 정도로 힘들게 찍은 작품이라 가장 기억에 남아.
일은 힘들어도 참을 만했지만, 신접살림이 늘 고달팠지. 입사 당시 이미 서른넷이었던 난, 그해 중매로 장가를 들었는데, 회사 형편이 그닥 좋지 못해 1년여를 봉급없이 생활했어. 막 세워진 신생 영화사가 촬영소 건립과 첫 작품에 무리한 투자를 해댄 통에 막상 직원들에게 줄 돈이 없었어. 다행히 30년 넘게 살아온 동네 인심 덕에 외상이나마 끼니를 이을 수 있었어. 월급이 나오면 그간 진 외상빚을 갚느라 사나흘 만에 다 없어져버렸지. 배고픈 신혼에 지친 아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지만, 카메라는 도저히 놓을 수 없었어. 다른 일을 하면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만큼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버티자. 버텨보자. 남의 등쳐먹고, 남의 눈에 피눈물내는 일 않고 이렇게 살면 되는 거다. 이게 떳떳한 내 일이다.’ 지금도 우리 자식들은 영화엔 별 무반응이야. 영화하는 아버지가 고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꼭꼭 박힌 탓일 게야. 어쩌면 영화에 대한 격한 감정을 무심함 속에 슬쩍 가리고 있는지도. 아버지의 열정이 영화 안에서 천천히 소진돼가는 모습이 그애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는 나도 알 수 없어. 다만 떳떳한 아버지, 늘 한길을 걷는 아버지로 기억되면 족해. 예전엔 종종 “스틸맨이 영화하는 사람 맞아?” 하는 비아냥과 무시를 당했지만, 지금 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길 해. “스틸맨은 그 영화를 ‘남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독보다 촬영보다 조명보다 더 부자다”라고.
구술: 백영호/ 스틸 작가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