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전까지는 수긍되지 않는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 같다. 지금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옆으로 보나 천생 삼십대인 여자가 됐지만 나, 삼년 전만 해도 삼십을 넘긴 여자들을 불쌍하다 못해 처연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에 무슨 낙이 있을까 이러면서. 지금도 마찬가지다. 40대의 내 삶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동네 사우나 가서 비닐을 허리에 칭칭 감고 동료 아줌마들과 수다떨고 있을까? 음,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 거잖아. 하물며 60대, 70대의 모습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자식한테 맞지나 않고 살면 다행이겠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나 <집으로…> 같은 영화도 있기는 하지만 사회의 마이너리티인 노인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당연하겠지. 일단 화면발이 안 서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빠진 이빨 사이로 발음이 세는 노인보다는 이정재나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좋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 영화 가운데 노인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한편 있다.
‘헤밍웨이와 레슬링하기’(Wrestling Ernest Heminway)라는 원제를 가진 <월터와 프랭크>다. 잘생긴 오빠들이 휘젓고 다니는 영화를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솔선수범해 이 비디오를 집은 건 아니었다. 지난해 필자가 몸담고 있는 매체에서 노인들의 성과 사랑이라는 기획을 준비하며 바쁜 시간을 쪼개 할아버지들에게 시간을 내줬다. <월터와 프랭크>는 일종의 실버 버디 무비다. 도무지 <대부>의 그 로버트 듀발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소심한 이발사 출신 할아버지가 월터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수염긴 교장 선생 덤블도어였던 리처드 해리스가 프랭크다. 해리 포터와 비교해 스타일 구기는 걸로 말하자면 껄떡쇠 노인으로 분하는 리처드 해리스도 듀발 못지않다.
두 사람은 돈없고 가족없고 친구없는 노인이다. 프랭크에게는 아들이 있지만 아버지 생일날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며 변두리 유원지에서 샀을 법한 싸구려 모자 하나를 덜렁 선물이랍시고 보내는 있으나마나한 가족이다. 너무나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은 할 수 없이 친구가 된다. 왜. 돈없고 만나주는 사람없고 시간만 많은 노인들의 동선이란 뻔하니까. 동네 아이들의 야구를 응원하고, 할리우드 흑백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은 이웃 마을에 불꽃놀이를 보러가기로 한다.
면허도 차도 없고 하필 버스는 안 다니는 날이어서 두 사람은 둘이서 페달을 밟는 자전거를 타고 떠난다. 그러나 자전거로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중간에 잠깐 쉬며 까무룩 졸던 그들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멀리서 터지는 불꽃을 함께 바라본다. 너무나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불꽃놀이란 반드시 애인과 함께 봐야 한다는 삶의 소박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장면은 내가 본 영화 속의 불꽃놀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랑에 좌절한다. 식당의 젊은 웨이트리스 샌드라 불럭을 좋아하는 월터는 고민 끝에 댄스파티에 가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결혼발표를 듣고, 자칭 카사노바 프랭크는 침발라놓았던 꽃미녀 할머니에게 치욕적인 거절을 당한다. 아무도 그들의 고통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 몰두할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두 노인의 실연은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노인들의 사랑이 가슴 뻐근한 무엇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궁금하다. 30년 동안 그러고 산 것도 지겨운데 환갑, 진갑 다 지나서까지 등대처럼 목을 빼고 물좋은 할아버지를 찾아헤매며 살 수도 있다니, 내 인생이 좀더 암울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