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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정책이론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 김혜준
2002-06-28

`맨땅에 헤딩`하며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양을 닦은 사람

김혜준씨는 문화관광부 관료들 사이에서 ‘언론플레이의 귀재’로 불렸던 적이 있다. 스크린쿼터나 통합전산망 사업 등 현안을 둘러싼 기자들의 곤혹스러운 질문에 그들은 입장을 밝히는 대신 “왜, 김혜준 그 사람 말만 듣고 그러느냐?”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오해에서 비롯된 항변이지만, 영화계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기자들이 그를 귀찮게 했던 건 사실이다. 안정숙 전 <씨네21> 편집장의 말대로 기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화진흥법이건 스크린쿼터건 기사를 쓰려면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기자들의 영화정책에 관한 생각은 김혜준씨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밖에.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김혜준씨는 한국영화계의 독보적인 정책이론가다. 여기서 ‘독보적’이라는 상투적인 수사는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다. 사실 정책 분야는 영화판에서 가장 따분해 보이는 일이다. 사람도 좀 따분해보인다. 막힘 없는 논리적 언변가이며, 술도 안마시고 약속은 결코 어기는 일이 없다. 이효인씨는 “저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충무로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김혜준 없는 한국영화판은 상상이 안된다. 그는 영화정책을 누구보다 먼저 공부하기 시작했고, 남들이 딱하다고 여길만한 성실성으로, 빛도 안나고 큰 보상도 예비되지 않은 그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사실 제작과 정책의 절묘한 합창이었고, 정책의 조타석에 그가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충무로의 도태를 감시하는 파수꾼이었고, 발전을 뒷받침하는 이론가였다. 기자들은 말할 것 없고, 많은 영화인들은 명계남씨 말대로 그에게서 과외수업을 받았다. 그의 관심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여느 이론가와 달리 그를 돋보이게 하는 점이다. 영화진흥법 개정부터 통합전산망 사업 추진까지, 그는 사안마다 자문과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 불려다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기동타격대’니 ‘5분대기조’니 그런 비유가 딱 들어맞았던 시절이었다. 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실무를 맡은 뒤, 이후 한국영화연구소를 거쳐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 영역은 가히 ‘전방위’라고 부를 만하다. 1997년 “반만 지켜도 성공”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DJ의 영상관련 공약에 영화계쪽 파트너로 그가 참여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시대의 문제아들’과 민족영화운동에 투신사실, 그가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 사연은 꽤 길다. 1988년,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K산업에서 세일즈 업무를 맡고 있던 그는 종종 은행을 다니던 친구와 함께 <금희의 오월> 같은 80년 광주를 무대에 올린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과 뭔가 만들고 싶다는 문화적인 갈증을 동시에 느꼈다. 이를 참다 못해 찾아간 곳이 당시 서울민중연합이라는 사회운동 단체에서 개설한 민족학교 강좌. 이재오, 임헌영 등 ‘문제아’로 낙인찍힌 이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효인씨를 만나 민족영화에 대한 개론을 듣고, 직접 연극을 만들기도 하는 등 이제껏 맛보지 못한 재미를 느꼈다.먼저 미국으로 이민간 어머니의 성화에 그해 겨울 한국을 떠났지만, 두달 만에 그는 다시 돌아온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 문화판에서 전문가 소리를 들어야겠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 이때다. 그는 일단 이효인씨부터 찾았다. 당시 이효인씨는 이정하, 구성주, 이상인, 민병진, 김재호, 이유미씨 등과 함께 민족영화연구소를 차려 활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결혼식 비디오를 찍으며 모은 돈으로 민족영화연구소의 살림을 책임지면서, 이후 <광주의 아들-이철규를 살려내라> 등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민족영화 1,2> 등의 저술 작업에 동참한다. 그 무렵, 서울민중연합을 만들었던 이재오씨가 구속되면서 그는 민족학교 강좌를 꾸려야 하는 사무국장 일까지 맡게 된다. 서울민중연합이 정치세력화를 꾀하면서 한때 민중당의 재정 담당을 맡기도 했던 그는 1993년 발족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에 뛰어들면서 충무로에 첫발을 내딛는다. 대종상 사무국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극장들의 비일비재한 한국영화 허위공연 신고를 잡아내는 것이 주업무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영화 상영한다고 허위신고 했다가 세번이나 연달아 위반한 극장을 적발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협 소속 위원이 와서는 지역사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면서 눈감아달라는 거다. 함께 활동했던 이정하씨가 그런 짓은 못한다고 딱 잘랐더니 얼마 뒤에 영협쪽에서 갑작스레 사무실 열쇠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왔다. 자신들이 얻어준 것이니 나가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비일비재하게 겪다보니 원칙은 절대로 버려선 안 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굳어졌다고 말한다.그가 뜻맞는 이들과 함께 자비를 털어 한국영화연구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스크린쿼터감시단에 몸담았을 때부터 지속적인 정책연구가 아니라면, 생산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그는 1995년 12월 발기인들과 함께 차린 자생적 연구소의 문을 연다. 정부와 영화계의 지원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산적한 현안들을 방치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듬해 한국영화연구소는 영화진흥법 개정안, 심의제도 개선, 방송과 영화의 연계 방안 등에 관한 ‘한국영화 환경,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연구모음집을 내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96년 검열철폐 캠페인을 시작으로 그해 영화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끌어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DJ 정부의 ‘비판적 조력자’하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1996년 8월에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그래도 약과다. ‘한국에서의 완전등급제’라는 주제의 정기포럼이 열리기로 예정된 날, 한국영화연구소 기획실장이었던 그는 발제자로 나설 참이었다. 그런데 참관을 위해 자리한 영화인협회, 전국극장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한국영화연구소의 정체를 밝혀라”, “등급제 안 해서 한국영화 망했냐?”며 수차례의 ‘돌출’ 발언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 이처럼 험악한 상황에서 포럼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지만, 그는 굳이 대응하지 않고 준비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완전등급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그는 정지영, 문성근씨 등 개혁적인 성향의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계의 분열(?)을 재촉하는” 주요 인물로 낙인찍혔다.이듬해 현 정부가 영화정책 공약을 만들때 주요 제안자였던 그는 ‘비판적 조력자’의 노릇을 톡톡히 했다. 영화진흥법이 여러 차례 개정됐지만, 애초 공약대로 완전등급제 실시가 미뤄지고 ‘등급보류’니 ‘등급거부’니 하는 독소조항이 끼어들 때마다 그는 표현과 창작을 저해한다며 반대 의견을 냈고, 이를 대체할 만한 법률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런 그가 1기 영화진흥위원회 출범과 함께 ‘스카우트’된 것은 당연했다. 물론 이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제도권으로 진입하면서 활동 범위가 아무래도 좁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오히려 그가 영진위 내부에서 활동을 펼쳤을 때 그의 정책들이 실질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는 것이었다.3년이 흐른 지금,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직책은 정책연구실장. 하지만 사무국 대신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도맡아 역할은 더욱 커졌다. 그가 적극적으로 개진한 제안이 영상전문투자조합 사업 출자. 그는 창투사 자본을 끌어들여 제작자본을 늘리고, 조합이라는 형태를 통해 금융자본을 안정화하는 것이 한국영화 산업의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봤다. 일부 영화인들은 “누가 영화진흥기금을 몇십억씩 가로채려는 음모”라고 수군댔으나, 결과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지난해 말 완성도 있는 저예산영화들이 극장을 잡지 못하고 줄줄이 넘어지자 세미나를 열어 저예산영화투자전문조합 결성, 시네마테크 전용관 마련 등의 제안을 발빠르게 수용한 것도 그다.

영화제작 전과정을 맛보지 못해 부끄러워그는 2년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출강하고 있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서 ‘영상산업과 정책’이라는 강의를 맡고 있는 것. 심광현 영상원장의 권유로 교단에 서게 된 그는 “현장에서 뛰려고 하는 후배들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한 아쉬움은 한국영화 정책이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다는 사실 앞에 더욱 커진다. 그는 “영화쪽에 몸담았던 시기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영화산업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내 경우에는 88년을 시작으로 할리우드 직배사가 정착하면서, 스크린쿼터제감시단 활동을 시작했지만, 한국영화 산업을 뒷받침하기에는 스크린쿼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는 판단에서 자꾸 연구 영역을 넓혀갔던 것 같다”면서 “해외와의 교류 등을 통해 제작 시스템을 둘러싼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좀더 다양한 정책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소망 아닌 소망을 덧붙인다. “개인적으로 단 한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맛보지 못했다. 그게 부끄럽다.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고. 그래서 현장에 이로운 정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증도 더 심해진다. 일단은 제작에 대한 워크숍 모임 등을 가지려고 한다. 물론 황철민 감독의 <프렉션>에 프로듀서로 이름을 걸어놨으니, 그것도 곧 책임져야 하겠지.”글 이영진 anti@hani.co.kr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김혜준을 말한다 우리의 물밑 과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