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토크 프로그램 ‘까르뜨 블랑슈’의 마지막은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봉준호 감독이 책임졌다. 그가 고른 상영작은 2022년 타계한 일본의 거장,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2000)였다. 그간 봉준호 감독은 일본 감독 중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사카모토 준지, 하마구치 류스케 등을 꾸준히 언급했었으나 아오야마 신지와 그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드물었다. 봉준호 감독은 “2000년에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플란다스의 개>를 상영한 당일 혹은 다음 날, 영화제에 함께 초청된 <유레카>를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라며 “다른 일본 감독들과는 친하게 지낼 기회가 많았지만, 왠지 아오야마 신지 감독님을 실제로 뵌 적은 없었다. 이렇게 영화로나마 인사를 드리는 기분”이라고 선정의 변을 밝혔다. 이어 “사실 이렇게 압도적인 감정을 주는 영화를 보고 나면 조용히 극장을 나서서 술이나 마시는 게 가장 좋겠지만··· 함께 본 영화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일도 영화제의 기쁨이죠”라는 봉준호 특유의 유머를 시작으로 <유레카>에 대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유레카>는 버스 납치 사건에서 목숨을 건진 버스 운전사 마코토(야쿠쇼 코지)와 나오키(미야자키 마사루),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 남매가 몇 년 후 재회하여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3시간 37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고요한 정적 아래, 주인공들은 함께 버스를 타고 각자의 감정을 매만져간다. 봉준호 감독은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는 식의 영화는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라며 “다만 진정한 마음의 여정이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강 둔치에서 맥주 한 잔을 같이 마시면 모든 응어리가 다 풀어지고 새로운 길을 간다는 이야기들도 있으나, 이 영화는 억제된 대사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 그렇게 인물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단 하나의 동작에 도달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인물들이 서서히 연결되어 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어떤 일들을 자연스레 가르치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마코토가 나오키에게 버스 운전을 가르쳐주고, 코즈에는 사촌 아키히코에게 폴라로이드를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각자의 삶이 조금씩 옮아가며 티 안 나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 <유레카>만의 치유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공간을 정말 잘 다루고, 그만큼 섬세한 카메라 무빙을 선사한다.”라고 그의 촬영 연출을 강조한 봉준호 감독은 “후반부, 빗속에서 야쿠쇼 코지 배우의 측면을 찍는 아주 부드러운 트랙인 숏이 있는데, 영화감독이라면 정말 질투심이 날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고 회상했다. 마지막으로 봉준호 감독은 사회자인 남다은 평론가에게 “관객들의 모든 질문과 궁금증을 아우르는 멋진 말로 행사를 마쳐달라”는 주문을 받고 살짝 실소를 터뜨린 뒤 답변을 이어갔다. “대기실에서 갑자기 ‘내가 생각하는 영화란 이런 것이다’라는 문구를 채워달라는 영화제의 요청을 받았다. 엉겁결에 ‘잊히지 않는 이미지’라고 적어버렸다. 아마 관객분들도 각자 <유레카>에서 잊히지 않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잘 간직하시면 좋겠다. 나도 그런 장면이 있긴 하지만···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