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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2- 보수는 공기처럼
2002-06-27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해미님.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8강에 오른 아침 서울은 열기로 가득합니다. 이런저런 방송과 신문들(심지어 와 <뉴스위크>를 포함한)이 요청한 월드컵에 대한 ‘독설’도 모두 사절하고, 그저 ‘축구나 보며’ 지내자 했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를 모욕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축제를 분별할 책임은 없지만 축제를 즐길 권리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요사스런 행태는 연신 내 속을 긁는군요. 그들은 붉은 악마의 구호에서 반공 콤플렉스에 대한 저항을, 시청 앞 응원전에서 6월항쟁의 함성을, 급기야 보라 역사가 바뀌었노라, 국민 통합을 외칩니다. 하긴, 무솔리니도 소싯적엔 사회주의자였지요.

지난번 편지에서 나는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는 표현을 하곤 하지만, 오늘 세상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보수입니다. 보수가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인 가장 큰 이유는 보수적 선전이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과 맞아.”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사회주의는 이미 끝난 얘기야.”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한 삶의 이치인 양 반복하는 이 말들은 실은 가장 강력하고 교활한 보수적 선전들입니다.

그 선전들에 최종적인 신뢰감을 심어주는 건 언제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입니다. ‘진보적 지식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한때 진보주의자였고 이젠 진보를 회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늘 그들의 나른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양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진보적 이력을 들먹입니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던 순간의 격정을 들먹이고 체 게바라나 마르코스나 켄 로치의 낭만을 들먹입니다. 그들이 ‘지난, 저기’의 진보를 들먹이는 이유는 단지 ‘오늘, 여기’의 진보에 혐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보수의 개’로 살아가는 제 ‘오늘 여기’에 품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는 오늘 세상의 주인에 꿇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해서 진보주의자는 세상의 외부에 처하게 마련이고(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보의 이런 상태를 관념성과 결벽증의 소산이라 말하지요) 진보적 선전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거칠며 위험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세상의 주인이 통제하는 모든 제도 미디어들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보수적 선전은 공기처럼 자연스럽지만 진보적 선전은 짐짓 혐오스럽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함께 국가주의적 광기로 폭발한 오늘치 <진보넷 참세상>의 머릿기사는 ‘단식 9일째, 시그 노동자들의 피울음을 먹고사는 영풍’입니다.

우리에게 쉽게 포착되는 ‘명성을 동반한’ 진보란 대개 세상에 수용된 진보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론 진보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수의 액세서리’입니다. 나는 보수의 액세서리인 주제에 엉뚱하게도 진보적 주장을 일삼는 경우입니다. 보기보다 실속있는 편은 아닙니다. “오로지 까대고 씹어대서 댄스가수적 인기를 누리는” 나는 글쓰기로 한달에 13만3천원을 법니다. 나는 세상의 내부에선 “현실과 경험에서 유리된 도그마에 빠진 위태로운 사람”이라, 세상의 외부에선 “우파와 어울리는 상업주의적 글쟁이”이라 모욕당합니다. 나에겐 세상 내부의 안락도 세상 외부의 안락도 없습니다. 처량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런 내 처량한 처지 덕에 안도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더한 모욕 속에서 나보다 더 처량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얘긴 다음에 해야겠군요(월드컵에 대해 해미님 동갑내기가 쓴 바른 글이 있습니다. <한겨레> 6월13일치에 실린 홍익대 1학년 문상욱씨의 ‘월드컵과 진보’라는 글인데, 그 글 앞에서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혀를 깨물거나 붓을 꺾을 만합니다. 웹에서라도 찾아 꼭 읽어보시지요). 2002년 6월19일. 김규항 드림.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