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골프라고 하면, 분명 일부 부유층이나 정치인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해보지 못하는 스포츠였다. 가끔 보이는 골프 연습장들을 바라보며 보통 사람들은 그저 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TV에서 가끔씩 새벽시간대에 편성되던 골프 관련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아주 한정된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하지만 요술공주 박세리의 등장 이후 상황은 조금씩 변해갔다. PGA나 LPGA투어의 경기 일정과 결과를 줄줄 외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타이거 우즈를 스타로 섬기는 이들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가 아직 보는 스포츠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골프장의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주말 시간대를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로 불리는 상황이니, 일반인들이 골프를 즐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우선 뉴욕과 같은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 어디서나 차로 20여분만 가면 수십개의 골프장을 만날 수 있다. 또 한국에서는 거대한 그물망에 갇혀 있게 마련인 골프 연습장의 경우, 광활한 대지 위에 그물이라곤 볼 수 없는 확 트인 연습장이 대부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골프장에서 진짜 골프 경기를 즐기는 비용이 10달러 미만인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골프를 10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골프를 치는 이들이 보기에는 거의 ‘공짜’의 수준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 게임에 수백달러가 드는 골프장들도 많지만, 프로 선수가 아닌 바에야 일반인들이 그런 비싼 골프장에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미국에서 골프는 한국의 ‘당구’나 혹은 ‘볼링’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골프 연습장에 가보면 골프화는 고사하고 슬리퍼를 신고 나와 연습을 하고 있는 중학생을 볼 수 있고, 4살 정도 된 딸에게 유아용 골프채를 쥐여주고는 스윙연습을 시키는 젊은 아버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프로선수에 버금가는 골퍼를 만난다거나, 골프에 미쳐 있는 마니아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 <베가번스의 전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쓴 스티븐 프레스필드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등 몇편의 소설을 발표한 그가 골프를 소재로 한 <베가번스의 전설>를 쓰게 된 것도 골프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의 골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소설 <베가번스의 전설>이 실은 힌두교의 신약성서라고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신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 약 700개 정도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는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무수한 힌두교의 종교철학서 중에서 예로부터 현재까지 가장 애독되고 깊이 존경을 받고 있는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두 무리의 군대가 서로 대립해 있는 전쟁터에서 아르주나라는 한 왕자가 겪는 정신적인 갈등을 그리고 있다. 적군편에 수많은 친족, 스승, 친구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동족끼리의 전쟁을 하지 못하겠다 하며 절망하고는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는 아르주나에게 힌두교의 신인 크리슈나가 깨달음을 주고 전장에 출정하게 한다는 것이 줄거리다.이런 힌두교의 고전을 바탕으로 1930년대엔 지금의 타이거 우즈가 부럽지 않을 인기를 끌었던 바비 존스와 월터 하겐이라는 실제 골퍼들까지 등장시켜가며 사실과 허구를 혼재시킨 소설이 바로 <베가번스의 전설>인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캐디 베가 번스는 크리슈나이고, 그로부터 골퍼로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 레놀프 주나는 바로 아르주나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이름인 베가 번스는 ‘신’이라는 뜻의 바가바드(Bhagavad)에서, 레놀프 주나는 아르주나(Arjuna)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속에서 베가 번스가 하는 대사들 중 상당 부분도 <바다바드 기타>에 나오는 시구에서 차용된 것이다.
어쩌면 너무 뻔할 수 있는 대중 소설 속에 이렇게 심오한 종교적인 내용이 숨어 있다보니,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고부터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진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일단 미국의 힌두교 종단이 이 영화의 제작 초기부터 영화 속의 베가 번스가 힌두교의 신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성명을 발표하고 제작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베가 번스를 흑인인 윌 스미스가 연기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원작자인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영화의 제작초기에 한 인터뷰에서 ‘예수나 간디처럼 대부분의 위대한 인물은 왕이나 왕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천한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나는 1931년도 미국의 남부에서 가장 미천한 인물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았고, 그것이 바로 흑인 캐디였던 것뿐이다’라고 미리 해명을 하기도 했다.여하튼 딱히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골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영화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뒷이야기를 알고 극장을 찾은 관객에게는 힌두교에 대한 관심까지 생기게 만드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 영화 속의 내용과 <바가바드 기타>를 비교 분석한 <그린 위의 노래>(Gita on the Green)라는 책이 발간되었을 정도니 말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영화 <베가번스의 전설> 공식 홈페이지
http://www.cannery.com/thelegendofbaggervance/
영화 <베가번스의 전설> 팬사이트
http://spielberg-dreamworks.com/legendofbaggervance/
소설 <베가번스의 전설> 홈페이지
http://www.harpercollins.com/baggervance/
<베가번스의 전설>의 뒷이야기들
http://www.lawbuzz.com/movies/bagger_vance/bagger_vance_ch1.htm
전설과 베가번스 홈페이지
http://www.bagger-van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