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월·화 밤 10시30분(월드컵 기간 중 변경될 수 있음)
지금 드라마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그 불가능성은 <사랑은 이런 거야>(KBS 일일연속극)의 과거를 숨긴 여자와 남자와의 결혼이나 <유리구두>(sbs 주말연속극)의 자매의 사랑 다툼처럼 드라마 상용 변수의 조합일 때도 있다. 하지만 돌출변수들이 드라마 실험에 동참했다. 금언으로만 여겨졌지 검증되지는 않은 명제들이 탐구대상이다.
‘정말 사랑은 국경을 넘는가’는 <그대를 알고부터>(MBC 주말연속극)가 연변처녀라는 독특한 변수를 도입하면서 실험중이다. ‘정말 사랑은 나이를 초월하나’, ‘정말 나이는 숫자일 뿐인가’라는 실험은 <로맨스>의 남학생과 여선생이라는 위기일발의 변수가 결합하면서 폭발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애인>이 논란과 함께 제기한 이래, <불꽃> <거짓말> 등의 화제작들이 집중되어 있는 명제, ‘결혼은 사랑의 끝인가’. <애인>의 결론이 여론과의 타협이었다면 <애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황신혜는 <위기의 남자>에서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버리고 꿈같은 성공을 누리며 시대를 따른다. 그리고 <위기의 남자> 끝과 맞물려 다시 실험이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불륜의 실험’. 제목 역시 주제가 명확하다. <거침없는 사랑>.
노처녀, 유부남을 만나다
8회 비오는 날, 서경주(오연수)는 차분하던 머리가 아줌마 파마 머리가 되어버렸다. 시장에 들어가 술을 시켰지만 주머니에는 꾸깃한 천원짜리뿐이니 안주도 못 먹겠다. 혼자라고 저쪽에서 술 먹던 남자들이 지분거린다. 열이 올라 오버를 했다. 식탁을 엎고 배째는 시늉으로 들고 있던 맥주병을 죽사리 벽에다 부딪혔다. 그런데 이게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깨지지 않더라. 맥주병을 이젠 인정사정없이 벽에 들이박았더니 그냥 목만 남고 부러져버리더라. 그래 맥주병은 이렇게 딱 부러지는 게 아닌가보다. 31살 서경주의 사랑이 맥주병 같았다.
(부러지지 않은 맥주병) 경주에게는 노처녀로 늙기 전 기회가 있었다. 8년을 친구처럼 알아온 민우(서태화)가 결혼을 제안했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민우는 경주를 보러 왔다가 만난 경주 회사 동료 원희(송선미)와 짧고도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곧 결혼한다. 민우와 원희의 결혼식, 그날 같은 곳에서 결혼식이 있던 정환(조민기)은 신부 채옥(유혜정)이 부케를 뭉개버리며 결혼 못하겠다고 난동을 부리자 밖으로 나오고, 부케를 안고 울고 있는 경주를 ‘출입금지’ 문 앞에서 만난다. 정환은 결혼을 속행하려고 경주의 부케를 빼앗아 채옥에게 갖다준다. 7년 뒤, 경주가 디자인한 텍스타일이 정환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허락도 없이 옷감으로 제조되면서 경주와 정환의 악연은 계속된다. (목구멍만 남은 맥주병) 하지만 악연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둘은 서로에게 끌린다. 경주와 같은 직업의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영재(송일국)는 경주와 동대문 시장에서 만나고 말다툼 끝에 헤어진다. 엄마의 “남자 찾아오라”는 등쌀에 떠밀려 나간 거리에서 경주와 영재는 다시 만나고 경주는 장난스레 “너 나랑 잘래”라는 말을 던진다. 이후 감정은 둘에게 각자 다른 몫으로 자리한다.
이것이 <거침없는 사랑>의 숨가쁜 전반전의 양상이다. 이외에도 이야기는 더 있다. 최근 미니시리즈들이 범했던 이야기의 단순함을 넘어서, <거침없는 사랑>은 복잡한 이야기로 미니시리즈의 미덕을 살려냈다. 서브 스토리 라인도 탄탄하다. 텍스타일 디자인 도난사건으로 알게 된 경주의 동생 경철(공유)에게 난영(박시은)은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중국 회사에 근무하는 국제적인 바이어 유지는 난영, 경철과 어울린다. 셋이 같이 간 술자리에서 경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뒤 난영은 약 탄 술을 마시고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탄탄한 서브스토리 라인, 현실적인 캐릭터
물샐 틈이 없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캐릭터다. 주인공 서경주는 31살 노처녀라는 설정부터 애잔함보다는 억센 느낌을 준다.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성격도 그렇다. 정환 역시 인정 많고 최선을 다하는 프로이지만 넉살 좋은 성격이라 “내 한몸 다 바쳐 웃길 수 있다면”이라며 가끔 물불 안 가리고 웃기는 상황으로 돌진한다. 그래서 둘이 이루어내는 상황은 치고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접대한다고 나와서 뻣뻣하게 굴고 기껏 춤을 춘다는 것이 막대토막 돌아가 듯하는 경주 앞에서 비웃던 정환은 급기야 돌아가는 경주 뒤에다 주문을 왼다. 콱 넘어져라. 그 말에 경주는 콱 거꾸러진다. 새삼 돌이키건대, 그건 모두 후회가 된다. 어느 사이에 마음이 끼어든 것이다. 절뚝거리는 경주가 불쌍해진다. 정환은 다짜고짜 업는다. 경주가 발버둥을 치자 인정을 베푸는 자가 벌컥 화를 낸다. “어허, 움직이면 더 무겁지.” 그들이 만나지말자고 서로에게 말하는 장면에서도 음악이 고즈넉이 흐르고 간지러운 말에 체하는 일은 없다. 밤새 울고 걸어다니느라 배가 고파 서로 바라볼 틈도 없이 감자탕을 열심히 먹고 앞에다 뼈만 수북이 쌓던 날이었다. 그러고는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다. 어렵게 떼는 사랑이라는 말에 정환이 따라 나와서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게 하는 말이 “사랑이 밥 먹여주냐”이다.
소재는 시작일 뿐이다
악역이랄 만한 캐릭터의 ‘이유있음’은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한다. 원희는 회사에 늦게 들어온 경주가 월급이 많자 경주를 대놓고 푸대접이다. 결국 경주의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진다. 그 이후 원희는 7년 동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의 ‘나쁜 년’이었다. 시부모님은 경주를 여전히 며느리보다도 예뻐한다. 시부모 댁에 들어가면서 뺀 아파트 전세금으로 마련해준 스튜디오에 남편은 기뻐하기보다 “내가 노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우냐”며 소리를 지르고, 결국 7년 전 아이를 지웠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이혼 말이 나오고 “결혼이 그렇게 쉬웠으니 이혼도 쉽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사이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는 건 남자를 빼앗긴 경주다. 이쯤 여자들 간의 현실적인 우정을 논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장 앞에서 똘똘 뭉치지만 서로의 오해 앞에서는 매섭게 싸우기도 한다. 그러면 불쌍한 여자가 남았다. 노처녀에게 남편을 뺏기게 되는 여자 채옥. 낳은 아이를 기르게 하고 뒷바라지를 시키는 바람에 정작 처음 유학간다 한 사람은 학업을 포기하고 장사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여자. 이런 남성의 희생은 바람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가. 그래서 채옥이 미워지도록 하기 위한. 하지만 채옥 역시 설득력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정환과 채옥이 결혼한 이유는 철저히 이해타산적이었다. 채옥은 정환이 뉴욕으로 유학간다는 것을 알고 결혼을 했고 정환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이 그녀의 이유였다. 채옥은 그렇게 얻은 학위로 회사에서는 짱짱하지만 집안에서는 응석받이가 된다. 아이의 앞에서 엉엉 울어버리는 채옥은 빈틈이 뻥뻥 뚫린 여자다. 그러니 채옥의 빈틈은 정환이 밖에서 사랑을 찾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남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채옥에 화가 난 것은 어머니다. 하지만 채옥과 말다툼을 벌이자 먼저 와서 정환을 타박하는 것이 어머니다. 둘의 화목을 가장 고심하여 지켜보는 것도 어머니일 것이다. 정환의 아버지는 사랑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러니 이 스토리는 적어도 누구를 악인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서로 원수로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줄거리, 둘이 안고 넘어가는 것으로 애정이 싹트는 사람간의 만남- <여우와 솜사탕>을 비롯한 많은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았던- 역시 이 드라마에서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이유있는 전개는 제작진이 퍽이나 고심하여 드라마를 짜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불륜’이라는 뻔할 것 같던 스토리는 세세한 점들이 갖춰지고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혼하고 결혼하고 다시 화해하고 하는 일들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드라마에 대한 기대치는 높다. 그래서 여느 드라마를 보면서는 거짓말 같았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문제는 단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다. ‘불가능 사랑’에 도전하는 드라마 실험들, 나이는 숫자이고,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고, 드라마 소재는 시작일 뿐이다. 구둘래 kuskus@dreamx.net▶ 뻔하지 않은 불륜드라마 <거침없는 사랑>
▶ 월드컵 이후의 TV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