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막식 때 나는 가족과 함께 상암동 경기장에 있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B석 입장권을 구입했다. 우리 가계 규모로 볼 때 쉽지 않은 지출이지만, 이런 데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것 또한 본 팀의 특장이다. 우리는 “월드컵 개막식을 보는 것, 평생 한번 있는 일일지도 몰라” 하면서 아이들을 경기장으로 데려갔지만, 구경 한번 하겠다고 33만원짜리 입장권을 끊는 일이야말로 평생 다시 없을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개막전에서 세네갈을 응원했다. 주위 사람들도 거의 그랬다.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들 일찌감치 마음이 세네갈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유야 짐작기 어렵지 않다. 우선 그들이 피부가 검다는 것, 피파 랭킹에서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체라는 것, 너무 가난한 나라라는 것,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도 얼마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운동장에서 노란색의 세네갈 응원단이 파랑색의 프랑스 응원단에 비해 절대 소수였다는 것.
약자에 대한 이 압도적인 연민!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이 위대한 권선징악!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소림축구’였다. 한국-미국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강자와 약자의 질서가 뒤바뀌는 드라마를 관람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역전의 드라마가, 그런 반전의 판타지가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축구가, 또는 영화가 그런 판타지를 제공할 때 우리는 열광할 수밖에 없다.
힘없고 가난하다고 깔보면서 으스대던 작자의 코를 납짝하게 만들어주고, 제 몫뿐 아니라 남의 몫까지 챙기고도 창피한 줄 모른 채 남들 위에 군림하는 작자를 상대로 보복의 한판을 벌이는 일이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남의 뒤통수 친 자가 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깔끔하고 통쾌한 반전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한때 ‘황금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축구 스타였지만 동료의 음모 때문에 절름발이가 되어 떠돌이로 늙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쓸쓸하게 인생을 마쳐야 할 것이다. 동료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놓고 돈과 권력을 싹쓸이한 축구계 거물은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본부석에 점잖게 앉아 있는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소림축구>라는 영화를 보자. 한때 대중을 열광시켰던 오른발을 질질 끌며 구걸하고 다니는 왕년의 ‘황금발’은 객석에서 애를 끓이는 관객의 소원대로 여봐란 듯이 재기에 성공한다. 꿈에 그리던 축구감독이 되어 소림축구팀이라는 황당한 팀을 이끌고 우승한다. 이게 홍콩영화였으니 이 정도였지, 만일 디즈니 만화였다면 절름발이까지 감쪽같이 고친 뒤 현역 선수로 복귀해 문제의 황금발로 멋진 슛골인 장면을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축구계 거물은 또 어떤가. 그라운드의 잔디를 모조리 뽑아버릴 정도로 황당하게 강력한 소림축구팀의 슛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본부석에서 엎어져 붉은 카펫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내려온다. 소림축구팀이 어마어마하게 큰 우승컵을 얼싸안고 있을 때, 아까 계단을 굴러내려가던 축구협회 회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쯤 되면 권선징악의 판타지라 부를 만하다. 사또의 생일파티장에 갑자기 ‘암행어사 출도여’ 하는 공습사이렌이 울려퍼지는 동시에, 방망이를 치켜든 행동대원들이 들이닥치면서 술상을 둘러엎고, 엉덩이를 걷어채인 사또 친구들이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오늘 생일인 사또는 권력남용과 부정축재 및 성희롱 혐의로 밧줄에 묶여 마당에 무릎이 꿇려지고. 이렇게 시각적으로 명쾌하게, 내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져야 판타지에 도달할 수 있다. 절대 비유법이나 간접화법을 사용하지 말고, 완곡하게 에두르지 말고, 신사적으로 정중하게 다루지 말고, 암시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꼬리를 사리지 말아야 한다.
현실에서야 어디 그런가. 선이 악을 이기고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스토리가 원래 드문데다, 이런 수준의 판타지를 연출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그야말로 ‘악의 축’이나 ‘악의 몸통’일수록 포커 페이스의 귀재들이고 복잡한 말로 사람 헷갈리게 만드니 세상일은 한없이 애매모호하게 돌아가고 도무지 시각적으로 명쾌한 반전이나 역전의 드라마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실생활에서 권선징악하기는 참 쉽지가 않다. 아, 그리워라! 소림축구. 조선희 /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