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실컷 웃고도 기분 나쁜 영화가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였다. 미련한 털실뭉치와 외눈박이 괴물이 찧고 까불 때는 봐줄 만했지만 아이들의 비명 대신 웃음소리를 회사의 에너지원으로 바꾼다는 마지막 반전(정말 반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에서는 정말이지 껌정 비닐봉지라도 있었다면 게워내고 싶을 정도였다. 아, 역시 디즈니는 안 돼.
왜 항상 아이들은 방긋방긋 웃어야 하고, 아이들의 웃음이야말로 무슨 행복의 상징이나 인생의 정답인 것처럼들 구는 것일까. 나이 서른에 봤기에 망정이지 비관주의자에 우울증 환자였던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봤더라면 노이로제 걸릴 뻔했다. 어린 시절 나의 비관성이 어느 정도였냐면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현관에서 신발도 벗으시기 전에 “할머니 몇밤 자고 갈 거야?” 묻곤 했다. 할머니가 “열밤 자고 갈 거야”(물론 그것도 거짓말이었지만) 대답하면 나는 그때부터 방으로 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열밤 자고 가지마, 더 자고 가” 이러면서 말이다. 할머니를 특별히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이모가 올 때도 삼촌이 올 때도 그랬으니까. 한마디로 칙칙한 성격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애니메이션 <보노보노>의 아기 해달 보노보노는 내가 아는 유일한 유아 비관주의자 캐릭터다. “다 틀렸어”라고 말하는 아기 해달이라니. 이 대사는 전장에서 총을 들고 쓰러지는 비장한 남자 캐릭터의 전매특허 아니었던가. 보통 아동 애니메이션(특히 너, 디즈니)에서 아이들은 <몬스터 주식회사>의 아기 부처럼 방긋방긋 웃고, 새로운 것을 겁내지 않으며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 웃는 애들이 거의 다다. 그러나 보노보노는 환경이 바뀌거나 새로운 무언가 등장하면 늘 괴물을 상상하면서 “결국 나는 잡아먹히고 말 거야”, “그 괴물은 깜깜한 굴 속에 나를 가두고 나는 숨도 쉴 수 없을 거야” 괴로워 하며 운다. 우는 것도 꼭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곡한다. 그리고는 너부리한테 얻어터진다. 나도 그랬다. 유치원 때 운동회를 앞두고는 늘 “내가 꼴찌를 할 거야” 또는 “달리다가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날 거야” 걱정 때문에 밤잠을 설쳤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듣고는 “이제 전쟁나서 우리는 총맞아 죽을 거야”라며 엉엉 울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약간 중증이기는 했지만 왜 어른들은 아이들은 모두 까르르 웃고, 솜사탕같이 달콤한 생각만 하며 좌절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들도 어린 시절을 겪었으면서. 그리고 곰곰이 따져보면 그 시절이 그닥 행복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보노보노의 일상에는 흥분되거나 깜짝 놀랄 만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조개를 깨는 돌멩이 하나를 찾는 데 하루를 홀딱 보내기도 하고 밤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 위해 숲을 하루종일 걸어다닌다. 놀이라고 해봐야 서로 코딱지를 튕기는 정도다. 포로리는 만날 너부리의 발길에 차이고, 너부리는 또 허구한 날 아빠의 발길에 차인다. 별로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인생들이다. 주제곡도 이런 썰렁한 노래가 없다. “그날그날이 너무나 따분해서 언제나 재미없는 일뿐이야, 사랑을 해봐도 놀이를 해봐도 어쩐지 앞날이 안 보이지 뭐야.” 아동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저한 허무주의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도 나름대로 인생의 쓴맛 단맛 다 안다. 그런 아이들에게 행복한 척하라고 시키는 건 폭행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그러지 마라. 너도 애낳으면 달라질 거라구? 그래서 애낳기 전에 썼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