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는 주인공의 눈물을 찍는 것도 주저했다. 한 병역거부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을 때다. 그는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몇 개월간의 경찰 조사, 몇 차례의 재판까지 충실히 겪은 뒤 최종 선고일을 맞았다. 최후진술을 마친 그는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홀가분함, 슬픔, 그동안의 고생스러움과 앞으로의 고난 등이 떠오르면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순간이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야 하는데, 그의 곁에 서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선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안 찍을 수는 없어서 주저하다가 어정쩡하게 담고 말았다. 첫 작업이었고, 다큐멘터리 윤리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상황을 겪고 나서야 자문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가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 드는 걸 주저했던 걸까?
누군가의 아픔, 괴로움, 고통 같은 것을 찍을 때면 유독 카메라가 흔들린다. 촬영 대상의 아픔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또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내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반사적인 망설임이다. 기록한다는 명분이 있을 때도 개운치는 않다. 그러니까 그런 내 마음은 알겠는데, 가끔은 그만 주저하라고 스스로를 타박한다. 반드시 포착해야 할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올렸다 내렸다, 물러났다 다가갔다 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장면만이 남을 때면 더욱. 물론 그 주저하고 흔들리는 카메라마저 때로는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은 참 복잡하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를 의심한다.
카메라를 드는 일은 곧 방황의 시작이다. 작은 캠코더 하나 들고 찍을 때 신체가 확장되며 더없는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실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극히 드물다. 새삼 그 사실을 더욱 깨닫는 요즘이다. 상대가 비인간동물이면 방황은 더 심해진다. 그러해야만 하고.
축산동물이라 규정된 존재들을 찍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촬영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관련한 고민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학대받는 동물의 이미지는 내게 한편으로는 화나고 슬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려야 한다는 목적만을 앞세워 정작 그 동물에 대한 존중은 간과하는 것 같았다. 고통만 부각되고 당사자는 사라지는 일종의 대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상화하지 않은 동물 이미지를 찾기가 더 어렵다마는.) 그러다 동물운동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변했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고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고통의 이미지가 어쩌고 했던 한때의 내 고민이 한가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당하는 동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서, 그들이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못 봐서, 이 문제에 덜 절실해서 내가 그런 우아한 고민이나 했던 것이다, 하고. 잔인한 장면이 많대서 계속 피했던 다큐멘터리 <도미니언>도 결국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영화 장면들에 시달렸다.
나는 주로 개농장을 찾아다니는 활동을 했다. 좁은 뜬장에 갇혀 사는 개들을 직접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어떤 동물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여길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현장에서 좀더 비참해 보이는 장면을 찾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들의 가여운 모습을 부각했다. 어쨌든 조작하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는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물의 비참함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빠져 있다가도 거기서 조금 빠져나와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다. 저널리즘의 영역과는 달리 그저 동물의 현실을 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 영화적인 것이라 할 무엇. ‘어떻게 동물을 좀 다르게 찍을 수 있을까?’ 동물의 고통 앞에서 이런 고민이 욕심 같지만 해야만 했다. 여전히 동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인간의 잔혹성을 자각할 만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동물의 몸이 훼손된 장면일지라도.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동물운동에 붙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음이 힘들어지는 고통의 이미지는 다들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축산동물의 현실은 알 만큼 안다고 여긴다. 어떻게 환기해줄 수 있을까. 그걸 위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운동가 김영환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고통스러우냐 아니냐는 식으로만 보여주면 거기에 무뎌지기 쉬워요.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서요. 당사자가 겪는 고통은 그 종류에 따라 점점 더 민감도가 커지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보는 사람이) 안 무뎌진다는 건 뭐냐, 일단 머릿속에 계속 담고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계속 이 존재를 생각하면서 떠올려야 되잖아요. 계속 재생될 그 무엇. 끊임없이 리마인드시키게 되는, 그러다 나로 하여금 비로소 사유하게 만드는 것 있잖아요. 수동적으로 텔레비전 보면서 ‘잘 봤다, 끝’ 이게 아니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 끝끝내 다 포착하지 못할, 즉 개체성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있잖아요.”
이미지 속 대상에 대해 ‘잘 알겠다’가 아닌 ‘다 알 수 없다’고 느끼는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이게 존중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동물운동을 접하기 전 피상적인 고민을 할 때와는 분명 달라졌다. 닭이 처한 처절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미지 속 닭이 소외되지는 않는 분명 더 나은 촬영과 재현의 방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걸 고민하는 게 우리의 일일 테다. 아직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비인간동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걸 의무화하는 걸로도 벅차다. <도미니언>처럼 축산업 현장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비인간동물에게도 인간을 촬영할 때 발생하는 온갖 복잡한 윤리적인 고민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