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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편의 영화, 그 첫발자욱
2001-03-26

홍성기 감독밑에서의 감독수업과 데뷔작 <여성일기>

해방이 되어 돌아온 고국에는 확실히 자유의 분위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영화계에서도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는 영화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역시 그러한 영화 중 하나였다. <자유만세>(1946)는

고려영화사의 첫 작품이었는데 제작비로 당시 돈 20만원이 들었으며 전창근이 각본과 주연을, 한형모가 촬영을 맡았으며 황려희, 유계선, 저택이

등이 출연했다. 개봉 당시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자유만세! 한국만세’라는 휘호를 내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된 작품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감옥을 탈출한 뒤 동지들과 투쟁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한다는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연출부 조수에서

퍼스트로, 때로는 촬영기사로 홍성기 역시 고된 고국 생활을 잊고 서서히 영화판에 애정을 붙여가고 있었다. <자유만세>를 찍을 당시, 한번은

촬영을 맡았던 한형모가 스트라이크를 한 적이 있었다. 감독의 권위적인 연출방식에 따른 잦은 마찰이 문제였다. 그때 최 감독이 홍성기에게

촬영을 대신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불과 이틀간이었지만 능숙하게 해내더란다. 그 모양을 보고 얼른 한형모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는 에피소드다.

연출부 퍼스트 시절 홍 감독은 콘티를 꼼꼼하게 짜기로도 유명했다.

당시에는 그림 콘티라고 해서 카메라 위치, 인물의 방향, 소품의 배치

등을 일일이 그려넣어 누가 보더라도 다음에 진행될 촬영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만주영화학교 당시 우치다 감독 밑에서

배우고 익힌 작업 스타일로 이후로도 홍성기는 콘티 없이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콘티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꼼꼼함과 섬세함, 그리고

영화에 다재다능함을 보이던 홍 감독을 최 감독이 믿고 아꼈으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었다. 미술부에서 일하고 있던 신상옥과는

별로 마주칠 일이 없어 당시에는 서로의 존재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최 감독 밑에서 일했던 양주남, 한형모, 신상옥, 홍성기

등 모두는 나중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진 감독으로 대성한다. 홍성기는 48년 최인규의 <독립전야>에서 연출부 생활을 마지막으로 한 뒤 49년

<여성일기>로, 촬영기사 한형모는 49년 <성벽을 뚫고>, 신상옥은 최 감독이 납북되던 해인 52년 <악야>로 각각 감독에 데뷔했다. 해방기

작품 활동은 1946년부터 시작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49년까지 이어졌는데, 총 제작편수는 59편에 달한다. 최완규의 고려영화사,

일제시대부터 있어온 동보영화사, 조선영화사 등의 메이저급 영화사와 신생 영화사들이 조금씩 그 세를 불려가기 시작한 때가 이쯤이다.

25살의 나이로 만든 첫 영화 <여성일기>(1949)는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라는

점과 두 유명 여배우의 캐스팅으로 먼저 유명해졌다. 황정순과 주중녀는 인자하고 후덕한 인상으로 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어머니상을 연기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배우들이었다. 이들의 캐스팅은 전적으로 홍 감독의 입회 아래 이루어졌는데, 사회사업가 황원순의 일대기를 다룬

<여성일기>에 적합한 인물로 온화하고 후덕한 인상의 두 여배우가 적극 추천된 터였다. 결국 황원순 역에는 주중녀가, 황원순의 모친 역에는

황정순이 결정되었다. 이 작품을 찍을 즈음, 국내에는 컬러필름이 귀했다. 미국이 주한미군에 보급한 것이 고작이었는데, 홍 감독은 그것을

공군당국을 통해 구한 모양이었다. 컬러라고는 해도 프린트를 뜰 수 없고, 편집필름을 직접 영사해야하는 16mm 반전필름(positive

film)이었기 때문에 이후 본격적 색채영화와는 달리, 프린트는 단벌이었다. 카메라는 16mm 넬 하우스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된 흥분도 잠시 뿐이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홍성기는 대구로 피난을 간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영화인들이 납북되었는데,

홍성기의 스승인 최인규를 비롯해 이명우, 홍개명, 김장혁, 박기채, 방한준, 안철영, 김영화 등이 그들이다. 전쟁중에도 피난영화인들은 영화

제작을 계속 진행시켰다. 홍성기도 같이 피난길에 오른 신상옥과 함께 대구의 공군 정훈감실에서 조직한 공군 촬영대에 입단하여 다시 카메라를

잡게 된다. 그러나 막상 같은 촬영대에 속한 신상옥과는 별도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공군 촬영대에서의 경험은 전쟁이 끝난 뒤 <출격명령>(1954)이란

작품으로 만들어진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운수대통> 등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