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들어오더니 신라면을 여러 그릇 주문했다. 조용하던 식당이 순식간에 요란하고 시끄러워졌다. 한 사람이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유튜브 라이브와 아프리카 방송을 한다고 했다. 동시 접속자가 500명이라고, 인도의 주요 지역을 하루씩 돌면서 챌린지 중이란다. 라면이 나오자 그들은 골목으로 나가서 인도 사람들에게 “이 라면을 먹으면 1천루피를 주겠다”고 외쳤다. ‘인도 사람들은 매운 라면을 먹으면 탈이 날 텐데….’ 30분 가까이 식당 바깥에서 소란이 이어졌다. 유독 아이들이 많이 모여든 것 같았다. 서양 국가에서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챌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인들이 만만한 거다. 그들의 무례함이 불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함께 즐거워할 500명의 유튜브 접속자들까지도.인도의 바라나시에 도착한 날 마주한 장면이다. 그들은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은 채 영상을 찍더니 소란을 피우고 떠났다. 한 소녀가 방금 먹은 라면이 너무 매웠는지 식당 입구에 앉아 우리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다. 한손은 이마를 짚고, 또 다른 손에는 지폐를 쥐고 있었다. 주저앉은 채 물 반통을 다 마시더니 고맙다며 눈인사를 하고 떠났다. 촬영 윤리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는 창작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들에게 영상은 뭘까? 또 누군가를 촬영한다는 행위는? 최소한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갖고 거리로 나왔어야 했다. 설령 그 소녀가 돈을 몹시 원했다고 해도, 아니 그걸 이용해 촬영한 것일 테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다음날 아침, 양손에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다니며 개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한 인도인을 만났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화를 내며 한국인 욕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몇 시간 뒤 우리는 카페에서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그 역시 어제 골목이 시끄러워서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다가 돈을 준다기에 라면 먹기 챌린지에 참여했다. 5분 안에 다 먹어야 했다. 그는 속이 뒤집어져서 하루 종일 배도 머리도 아팠다. 요리사인 그는 문득 그 한국 라면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고, 인터넷으로 찾아본 성분표에 소고기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제 그는 마음까지 괴로워졌다. 힌두교인들에게 소고기는 금기시된다. 독실한 힌두교도인 그는 무언가 훼손됐다는 죄책감과 분노가 일었다. 아마 이것까지는 그 한국인들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비록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그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촬영을 할 때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위계의식이 있다. 나 역시 자유롭지는 않은데, 나도 모르게 인도에서는 ‘찍어도 괜찮다’는 무의식이 발동하는지 한국에서라면 눈치가 보여 찍지 못했을 인간의 모습 앞에서 평소보다 쉽게 카메라를 들게 된다. 며칠 전 바라나시의 아주 좁은 골목에서 두 청년이 물동이가 가득 담긴 리어카를 밀고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리어카에서 자꾸 물동이가 떨어지는데 계속 싣고 또 실으며 애쓰는 모습에 눈이 가서 무심코 휴대폰을 들어 영상을 찍었다. 그때 리어카를 끌던 청년이 나를 향해 말했다. “촬영하지 말라”고. 난 왜 당연히 찍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바로 사과했고 오래 뜨끔했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도 그렇다. 가령 나도 모르게 이런 구분을 한다. 결과물을 볼 가능성이 낮은 촬영 대상에 대해서는 재현의 자유도가 높아진다(물론 아무리 자유롭게 해도 내가 어떤 선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그리고 영화 매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싶어도 덜 조심하게 된다. 반면에 자신, 그리고 재현된 자신에 대해 섬세하게 가늠할 것 같은 촬영 대상에게는 확실히 더 신경 쓰게 된다. 이런 내가 참 치사하다. 그렇다고 마냥 조심한다고 해서 작품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 창작자가 타자의 모습을, 삶을 다루는 일에 다각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 사실에 너무 압도되면 계속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무 재현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최선이기 때문이다. 조심하면서도 과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쨌거나 위험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어제는 내가 묵고 있는 벵갈리토라 골목에서 몇 킬로 떨어진 이슬람 시장을 다녀왔다. 힌두교 사원들이 늘어선, 그래서 육식을 금기시하는 이곳과 달리 그 마을에는 동물을 죽이고 판매하는 곳들이 있었다. 길가 수송 트럭에 실린 닭들의 모습이 한국과 똑같았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날개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깃털이 거의 없고, 듬성듬성한 깃털은 습기에 푹 젖은 채로 닭들은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두 청년이 수시로 닭을 날랐다. 한번에 여럿의 닭들이 몸이 뒤집힌 채로 100m도 안되는 곳에 있는 도살장으로 옮겨졌다. 닭을 찍을까 머뭇거리는 나에게 한 청년이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즉 인도인 특유의 긍정적인 제스처를 하며 닭을 들어보였다. 찍으라는 거였다. 수송 트럭도 찍으라고 했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촬영 윤리에 대해 고민할 새도 없이 상대가 흔쾌히 받아주고 심지어 적극적인데도 말이다. 한국에서는 도계장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기만 해도 직원이 다가와 뭘 하냐고 의심한다. 수송 트럭에 구겨져 있는 닭의 이미지가 인간에게 어떤 반감을 일으킬지, 그리고 고기 소비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또 개인마다 이미지에 대한 판단은 이렇게도 다르다. 닭의 모습을 찍지 못하면 속상했겠지만 막상 찍으라고 하는데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찍히는 건 닭인데, 정작 닭에 대한 고려는 없다. 모두가 닭을 소외시킨다. 그래도 카메라를 드는 순간 솔직히 찍을 수 있어서 살짝 들떴고, 들뜨는 내가 한심했다. 찍는 동안 프레임 바깥의 닭과 눈을 마주치기가 왠지 부끄러웠다. 어쨌든 견디며 찍었다.